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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Feb 09. 2024

지하철 빌런과 도시 유목민

일상기록

퇴근하려고 1호선을 탔다. 복작복작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목소리였다.

"당뇨발을 수술해야 합니다. 5백원만 도와주세요.."


'5백원'이라는 구걸 액수가 귀에 꽂혔다. 요즘 5백원으로 무얼 할 수 있을까? 껌 한통은 사먹을 수 있으려나. 천 원도 아니고 5백원이라. 나는 왜 이 남자가 뭘 해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5백원' 을 달라고 하는지 궁금해졌다. 조금 있으니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아저씨의 옷은 남루하고 더러웠으며 왼쪽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렸는데 당뇨발이라고 했던 것처럼 정강이 아래부터는  피부색이 온통 변한 채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심각해 보이는 왼쪽 발을 드러낸 채로 절뚝거리며, 5백원을 달라고 되풀이 말하며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누구도 그의 손에 5백원을 쥐어주지 않았다. 물론 나조차도.


사실 지하철 1호선은 예전부터 각종 '빌런'이 자주 출몰하기로 유명한 노선이다. 나는 대학 1학년때부터 1호선을 탔는데, 3학년 때 인천으로 이사가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는 빌런을 참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중 기억나는 빌런으로는 '목발 빌런'이 있다.


지하철 1호선을 심심하지 않게 해 주는 빌런의 모습

목발 빌런은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는데 지하철에 타자마자 바지를 걷어올리고 의족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주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장애인입니다. 서울 시민 여러분, 인천 시민 여러분, 장애인을 도와 주세요!"

구걸을 하는 사람치고는 체격이 너무 훌륭했으며 태도 또한 당당해서 그의 바구니는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어느 날, 어떤 아저씨가 목발 빌런의 바구니에 천 원을 넣어 주었다. 그러자 그의 '인사 세례'가 시작되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선생님!"

목발 빌런은 거짓말 보태지 않고 적어도 열 번 정도, 매우 큰 목소리로 인사를 반복했고 그 아저씨는 적선을 한 죄(?)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아마 그 아저씨는 그날의 대단한 경험 덕분에 다시는 지하철에 다니는 빌런들에게 자선을 안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당뇨발을 내보이며 절룩거리면서 걸어다니는, 왜소하고 남루한 남자를 보며 나는 오래 전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1호선에서 보았던 목발 빌런을 잠시 떠올리기도 했지만 그 기억이 당뇨발 아저씨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지하철에서 수시로 볼 수 있는(예전보다 적어지긴 했지만) 구걸자들이나 빌런들에게 일일이 반응해 주기엔 나는 그런 일들에 너무 익숙해 있었고, 지쳐 있었다. 왠지 그런 것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무감각한 상태로 있어야 서울이라는 각박하고 삭막한 도시에 완전히 적응한 사람일 것 같았다.


그렇기에 당뇨발 아저씨의 모습과 목소리는 지하철 1호선을 내림과 동시에 기억에서 삭제되어야 마땅하다. 그게 이 거대하고 사막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서울 시민'의 자격일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변색되고 퉁퉁 부은 왼발이 생각나는 것일까. 그런 걸 보면 나는 아직도 서울이라는 도시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마음 한 조각은 서울 아닌 어느 호젓한 남쪽 도시에 놓고 온 '도시 유목민'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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