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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Feb 24. 2024

미지의 세계

일상기록

퇴근길 지하철에서 다소 특이한 광고를 보았다. 극지연구소에서 사람을 구하는 광고였다.

광고의 내용은 남극과학기지에서 약 1년간 머무르며 일할 인력을 뽑는 거였다. 물론 과학연구를 할 인력은 아니고 시설이나 조리직이었는데, 이 사람들 역시 자기 업무분야에 상당한 경력이 있어야 뽑힐 것임에 분명했다.


시설 관리나 조리 쪽에 아무 경력도 지식도 없었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이 광고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니, 설령 모집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자격이 있더라도 나는 현재 다니는 직장이 있고 무엇보다도 돌봐야 할 가족이 있었다. 이런 모든 것들을 두고 남극으로 1년간 훌쩍 떠나버리는 것은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불가능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광고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남극에 간다면? 다 떨쳐버리고서 말이야.


사실 남극은 나에게 무척 고마운(?) 곳이다. 남극에는 펭귄이 살고, 펭귄 중 가장 유명한 녀석은 바로 이 녀석이기 때문에.

뽀로로는 처음 나왔을 때 왼쪽 모습이었지만 이후 오른쪽 모습으로 바뀌었다. 옷도 입고.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운 부모라면 누구나 뽀로로를 집안에 모셔놓고 하루 세 번씩은 그 앞에 절을 올려야 마땅하리라. 뽀로로는 눈 덮인 언덕에서 굴러도, 구덩이에 빠져도, 심지어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 떨어져도 반창고 하나만 붙이고서 벌떡 일어나는 불사신의 모습을 보이며 늙지도 죽지도 않고 대한민국 영유아들의 놀이와 식사와 휴식과 그 외에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책임져 주었다.


이런 기특한 뽀로로가 사는 곳이 남극이다. 그래서 내가 가보지도 않은 남극에 '내적 친밀감'을 느낀다면 웃긴 소리겠지만 하여튼 뽀로로와 함께 두 아들을 키워서인지 나는 괜히 남극이 낯설지 않았고, 한번 가보고픈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남극에 가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고(추위도 더럽게 많이 타면서 남극은 무슨), 뽀로로 어쩌고는 웃자고 한 소리일 뿐이며 정말로 원하는 건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까지 남들이 정해준 대로 살았다. 내 주변에는 진로를 정할 때 "너는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못했고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원도 한 학기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다니는 직장도 내 의지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이러구러 시간이 흘러 어느새 10년차가 됐지만. 내가 내 의지로 결정한 건 남편을 만나 사귀고 결혼했던 일과 지금 다니는 세종사이버대에서 문예창작 공부를 하기로 한 것 뿐이다.


주변에서 진로를 정할 때 내 의사를 물어보는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설령 있었다고 해도 겁이 많은데다 '어른'의 의사를 여간해서는 거스르지 않는 나의 성향상 내가 통상적인 진로와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했을 가능성은 무척 낮았을 것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것'과 '아예 못하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내가 선택하지 못한 진로에 대해서 아직도 가끔 아쉬워하며 무엇 하나 내뜻대로 하지 못했던 지난 시절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 전철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며 바라본 남극과학기지 구인광고는 그래서 마음에 오래오래 남았다. 물론 나는 남극에 가는 일도, 지금 다니는 직장을 홀연히 때려치우고 '제2의 길'을 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는 나이도 엉덩이도 무거워졌으며 무엇보다도 이제 내가 무얼 하고 싶어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 또 어떤가. 이렇게 하루하루를 성실히, 열심히 사는 것도 그 나름의 보람이 있으며 칭찬받을만한 일인 것을. 그래도 오늘은 오랜만에 뽀로로 영상이나 몇 편 틀어봐야겠다. 애들과 함께. "노는 게 제일 좋아"로 시작하는 뽀로로 주제가는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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