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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Feb 25. 2024

김 계장의 잃어버린 젊음에 바치는 애도

일상기록

10년 전, 늦은 나이에 00기관 신규직원으로 공직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의 일이다. 나는 경기도 내에서 격오지로 분류되는 어느 소도시에 배치되었고, 거기에는 퇴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김 계장'이 있었다.


그는 계원이라고는 나를 포함해서 두 명뿐인 관리계의 계장이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했던 첫 인사는 인상깊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너 육아휴직 쓰면 죽을 줄 알아"

그 거친 언사에 놀랄 틈도 없이 그는 신규직원인 나에게 본인과 국장의 업무포털 로그인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준 채 외출해 버렸다. 그러나 나를 빼고 아무도 그의 무단외출에 놀라지 않았다. 알고보니 그는 퇴직할 시기가 다 되도록 승진이 안 되어 기관 본부에 대한 울분이 가득한 사람이었고, 그 화풀이(?)를 복무를 엉망으로 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사람이었다.


그 기관의 업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데 일을 가르쳐 주기는커녕 내 업무를 관리하고 감독할 관리자들이 모두 업무를 방기한 채 내게 결재권한까지 떠넘기고 자리를 비우는 일상은 신규직원인 나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내 업무 중에는 예산을 집행하는 것도 있었는데 이게 제대로 된 지출인지 아닌지 감을 잡을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 누구도 내게 잘했다 잘못했다를 알려주지 않으니 나는 매일밤 '업무처리를 잘못했으면 어쩌나'하는 걱정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매일같이 장님 문고리 더듬어 잡는 식으로 업무를 하는 것도 벅찬 상황이었는데 그런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건 말도 안되는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기관에는 업무용으로 스타렉스 한 대씩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김 계장은 그 스타렉스를 무단으로 운전하여 멀리까지 놀러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는 그가 화천에 산천어축제인지를 보러 간다고 나선 날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 전화가 왔다. 화천 가다가 도랑에 스타렉스 바퀴가 빠졌으니 보험사를 불러달라고.


그가 저지르는 사고를 수습하는 건 당연히(?) 신규직원인 내가 할 일이었고, 나는 이 영감탱이의 사고를 뒤처리해주러 내가 그 고생하며 공부해서 시험 합격했나 하는 회의감을 지울 수 없었다. 당시 기관에서는 처리할 업무가 늘어나서 일용인부를 사용해야 했는데, 그들의 임금 지급을 위해 신분증과 통장 사본을 받으려는 나를 김 계장이 제지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네가 그렇게 에프엠으로 일을 처리하면 우리가 나중에 경비 삥땅을 못 치잖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에 집이 있었는데도 가정 불화와 출퇴근 편의 등을 이유로 32평짜리 사택을 혼자 사용하고 있었는데, 내 출근시간이 1시간 반에서 2시간 가량 걸린다는 소리를 듣고는 이렇게 제안했다. "너 나랑 사택에서 같이 살자"  

그뿐인가. 그는 나의 친정엄마가 남편 없이 혼자 계시다는 걸 알고는 "네 엄마 나한테 소개시켜 줘" 라고 하는가하면, 본인과 '모종의 관계'에 있던 웬 아줌마를 임시직 공무원으로 취직시키는 능력(?)을 선보였다. 점심시간에 김 계장이 "나 팔 아파!" 라고 하면 그 굴러들어 온 아줌마 직원이 "어머 그래요? 팔 이리 줘봐요" 하며 김 계장의 말라비틀어진 팔을 주물러준다 파스를 붙여준다 하며 사무실에서 갖은 꼴값을 떨어대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걸 본 내 눈알을 뽑아다가 세면대에서 씻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다 어느 점심시간, 김 계장이 오래된 흑백사진을 직원들에게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교복을 입고 까까머리를 한 남학생들 대여섯 명이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그 중에 자기가 있으니 찾아보라는 거였다.

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래 전 사진임에도 사진 속의 젊은, 아니 어린 김 계장은 눈매와 턱선이 지금과 비슷했다. 그를 금방 찾아낸 나의 눈썰미를 건성으로 칭찬한 후, 김 계장은 고등학교 시절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다녔던 00고등학교는 지역에서 제일가는 명문이었고, 그래서 들어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으며 자기가 한때는 그렇게 총명하고 전도 유망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비록 그날 아침, 그는 본부 인사부서에서 "그쯤 다녔으면 이제 명예퇴직 하시죠?" 라는 전화를 받고서 "니들이 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 라며 역정을 냈지만.


나는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김 계장에게도 젊은 날이 있었구나. 이렇게 푸르고 아름답고 빛나던 시절이 있었구나. 그가 늦은 나이까지 승진을 못한 이유 중 하나가 기관에서 처음으로 노조를 만들었다가 미운털이 박힌 때문도 있었다고 하니 그 나름대로는 정의로웠던 때도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갖고 김 계장을 보니 그의 충혈되고 탁한 눈과 동태찌개를 게걸스레 먹어치운 후 자기자랑에 여념없는 입을 차마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타락시켰을까 궁금했다. 사진 속에서 교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입을 야무지게 앙다문 채 눈빛을 빛내고 있는 소년이 몇십년 후 직원에게 그의 엄마를 소개해 달라고 하고, 경비 횡령을 아무렇지 않게 지시하며 사무실에서 부인 아닌 여자와 애정행각을 서슴지 않는 추한 중늙은이가 되리라고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그 몇십년 동안 그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가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든지, 그리고 그가 퇴직 후 무슨 삶을 살든지 그의 젊음은 이미 오래 전 어느 순간 빛과 호흡을 잃고 사망했던 것이다. 김 계장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죽은 지 한참 된 본인의 젊음을 영정사진마냥 들고 나타나서 몇십년 전의 영광을 사골국물마냥 우려내는 그를 보며, 나는 마음 깊이 애도했다. 화장조차 못한 채 사그라들어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 김 계장의 아름다웠을 젊은 시절을. 그리고 내가 김 계장의 나이가 되었을 즈음에는 부디 내 젊음이 어디쯤에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차릴 분별이 내게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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