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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Mar 02. 2024

옛 전남도청 앞에서

일상기록

삼일절 연휴를 맞아 나와 아이들은 남편을 보러 광주로 내려갔다. 연휴이기도 하고, 애들 방학이기도 하고 3월 2일이 우리 결혼기념일이기도 해서 겸사겸사 간 거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광주시내 어딜 다녀볼까 하다가 '아시아 문화전당'이라는 곳에 전시를 보러 갔다. 하필 그날 꽃샘추위가 지독하여 날이 몹시 추워서 실내로 가자는 생각에서였다.


아시아 문화전당 근처에는 옛 전남도청이 있었고, 복원공사를 하고 있다는 안내가 있었다. 그리고 옛 도청 앞 광장에서는 10대로 보이는 남학생들이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스케이트보드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몸이 별로 좋지 않았고 날도 몹시 추웠지만, 그리고 비록 복원공사 중이라지만 전남도청 앞을 그냥 지날수는 없어서 아쉬운대로 공사 가림막 사진이라도 찍었다. 아이들이야 1980년에 광주에서 벌어진 5.18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을테지만, 그리고 자기들이 태어나기 한참 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별 감흥이 없을테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았다.


1980년에 나는 제주도 산골짜기에 살고 있었고, 당연히 집에 티비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시 '광주'라는 곳에서 뭔가 큰일이 났다는 것을 어른들의 대화를 통해 어렴풋이 알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아빠나 엄마가 마을에 티비가 있는 집에서 뉴스를 보고 알려준 이야기를 들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때 아마 다섯 살쯤, 많이 어렸고 광주가 어디인지도 몰랐으며 '큰일'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 당시 나에게 '큰일'이라면 수시로 비바람이 불며 요동치는 날씨 속에서 집 바깥에 있는 변소에 어떻게 혼자 다녀오나 하는 것 정도였다.


그러다 제주를 떠나 뭍으로 이사를 왔고, 나는 티비 뉴스를 보며 거기서 나오는 소식이 무엇인지 알 정도로 자랐다. 내가 초등학교 5~6학년 무렵, 뉴스는 매일같이 대학생들의 '극렬 시위' 소식을 세뇌하듯 내보냈다. 당시 우리는 전남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 뉴스는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자주 알렸는데, 그걸 볼 때마다 아빠는 큰 눈을 부라리며 "저 빨갱이 새끼들! 공부하기 싫어서 시위하는 새끼들! 다 쳐 죽여 버려야 해!" 라는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1980년대 대학생의 시위 모습

당시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읊어대는 소식이 무슨 말인지 정도만 알았고 그 이면의 의미까지 알지는 못했던 나는, 그래서 꽤 오랫동안 '시위하는 대학생=공부하기 싫어하는 빨갱이들' 이라는 공식을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그런 생각은 대학 2학년 때, 5.18을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바로잡기 위한 대학생들의 연합운동을 거치며 깨어지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아빠는 대통령 선거 등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후보로 나오면 그를 찍으라고 엄마에게 대놓고 종용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어떻게 군부독재에 항의하여 목숨을 건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을 '공부하기 싫어 거리로 나온 빨갱이'로 치부할 수 있었는지, 그 모순되며 왜곡된 역사인식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1987년,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마침내 헌법이 개정되고 군부독재가 막을 내렸(다고 생각되었)을 때, 모르긴 해도 많은 이들은 그보다 7년 전, 남쪽의 한 도시에서 용감하게 떨쳐 일어났던 핏빛 시민들을 떠올렸으리라. 5.18은 그것이 현대사에 갖고 있는 비중이 큰 만큼 아직도 그날의 '순수성'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모종의 음모론을 제기하는 자들이 있는 형편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현재의 민주주의를 향유하며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1980년 광주에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5.18의 상징적인 장소인 옛 전남도청 앞을 지나며 보았던, 스케이트보드를 연습하는 10대 남학생들의 모습은 그래서 퍽 인상깊었다. 계엄군의 탱크도, 시민군의 트럭도, 그들이 강물처럼 흘렸을 많고 많은 핏방울도 묵묵히 떠받치고 받아들였을 옛 전남도청 앞 광장은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10대 아이들의 추위를 뚫을 듯한 활기를 지지해주고 있었다. 5.18 당시 10대 학생들의 참여가 적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의 희생도 상당히 컸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문득 40여년 전의 10대 학생들과 2024년 지금의 10대 학생들의 떠들썩한 웃음과 몸짓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로 섞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5.18 당시 전남도청 앞 모습
5.18때 아버지를 잃은 소년이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든 모습. 이 소년은 나와 동갑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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