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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Mar 09. 2024

동네 수퍼같던 편의점의 작별인사

일상기록

요즘은 동네 곳곳마다 편의점이 있지만, 편의점이 이렇게 대중화되기 전에는 그 자리에 동네 수퍼마켓이 있었다. 동네 수퍼는 학교 앞 문방구와 함께 그 시절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안에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곱고 멋져보였으며, 과자들은 어쩜 그리 맛있게 생겼던지. 하지만 당시 문방구에서 십원에 네 개 하던, 흰 강낭콩 모양을 본떠 만든 캬라멜 사먹을 돈도 별로 없던 나에게 수퍼에 있는 물건들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나이를 먹으며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고, 성인이 되어 직장에  다니면서 내 주머니 사정도 많이 나아졌고 동네 수퍼에서 원하는 물건을 사는 게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결혼하여 큰애 건명이를 낳고 의정부에 살 때였다. 당시 우리 아파트 바로 앞에는 작은 수퍼가 하나 있었다.


수퍼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내게는 그곳이 퍽 유용했다. 건명이가 갑자기 어떤 과자를 먹고 싶다고 할 때 수퍼는 집에서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불과 몇 분이면 다녀올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좋았던 것은 그 수퍼 주인 아주머니가 잠깐씩 건명이를 봐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건명이가 네 살이 되던 해에 나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 시작했는데, 가끔 아는 언니와 만나 점심을 먹을 때가 있었다. 당시 아기였던 민근이를 데리고 온갖 아기용품들을 바리바리 챙긴 후 버스에 몸을 싣고 노원까지 가서 백화점에서 식사를 하는 건 힘들고 번거롭기도 했지만 조금은 힐링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정말이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기 마련이라, 밥 먹고 커피 한 잔 할라치면 금세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고 말았다. 아이 하나만 키우고 있던 그 언니와 달리 나는 유치원에 가 있는 건명이가 하원하는 시간에 맞춰 집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날은 아이를 오후 다섯 시쯤 끝나는 종일반에 맡길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두 아이를 단 한 번도 종일반에 맡기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내 몸이 좀 더 편해지고 숨통이 트일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때는 전업주부였는데, 말 그대로 가사를 돌보고 아이를 키우는 게 내 '직업'인데 내 몸 좀 힘들다고 어린 애들을 하루종일 유치원에 보내놓는 건 양심도,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어른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집에 빨리 와서 편히 쉬고 가족들을 만나고 싶을텐데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언니와 식사를 하고 집에 오는 시간은 늘 빠듯했고 쫓겼다. 마음이 급할수록 버스는 오지 않았고, 겨우 도착한 버스에는 자리가 없었으며 버스는 굼벵이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게 서둘렀는데도 나는 가끔 유치원 버스가 집 앞에 도착하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그런 날이면  유치원 선생님의 전화가 왔다. 처음으로 건명이 하원시간을 맞추지 못한 날, 얼마나 당황했던지. 축지법을 써서 집으로 달려갈수도 없던 나는 급한 김에 아파트 바로 앞에 있는 수퍼에 아이를 좀 맡겨달라고 이야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온 몸에 땀을 처덕처덕 흘리며 수퍼에 달려가서, 그곳에 있는 형형색색의 물건들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건명이를 보며 깊이 안도하고 감사했다.


그 뒤로 많지는 않았지만 몇 번 정도 그런 일이 더 있었고, 그때마다 수퍼 주인 아주머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건명이를 데리고 있다가 허겁지겁 달려간 나에게 잘 인도해 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수퍼는 물건을 다 빼고 문을 닫았고, 며칠간의 공사 끝에 그 자리에는 모 브랜드의 편의점이 자리잡았다.


편의점은 전에 있던 수퍼와 비교할 수 없이 밝고 화려했다. 그런만큼 물건은 비싸졌으며, 근무하는 사람도 푸근하던 아주머니에서 사무적으로 포스기를 찍는 나이 어린 알바생으로 바뀌었다. 나는 이 어린 알바생에게 건명이를 부탁할 수 없다는 걸 즉각 알 수 있었다. 다행히 그 무렵 친정엄마가 같이 와서 사시게 되어 아이를 다른 곳에 맡겨야 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러다 시간이 지나 건명이가 초등 1학년 때 우리는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아파트 앞에는 씨유 편의점이 있어서 급하게 뭔가를 살 때 편하겠구나 싶었다. 그냥 물건만 사고 나올 요량으로 편의점에 들른 나는, 그러나  사람 좋게 생긴 주인아저씨의 인사에 다소 놀라고 말았다.

"새로 이사오셨나봐요? 여기 아파트 위치가 참 좋아요. 조용하고.. 좋은 곳에 잘 오셨네요"


편의점이라면 마트보다 다소 비싸게 값이 붙은 물건을 어린 알바생들이 건조하게 계산해 주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던 나는 아저씨의 뜻하지 않은 환대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리고 그 후 십 년 동안,  당시 초등학생 유치원생이던 우리 애들이 각각 고등학생 중학생이 되도록 우리집은 그 편의점을 참 많이도 애용하였다. 이른 아침 출근할 때 보면 주인아저씨는 늘 점포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느긋하게 피우거나 동네 사람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왠지 나에 대한 인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 적은 없었지만, 왠지 이런 편의점이라면 우리 애들을 어릴 때 동네 수퍼에 그랬던 것처럼 잠깐씩 부탁해도 될 것 같았다.


그랬던 편의점이 14년의 시간을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아이들과 지방에 갔다가 오던 날, 편의점에 불이 꺼지고 물건이 없이 텅 비어 있어서 보니 문에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14년이나 한 자리에서 잘 버텨오던 아저씨가 왜 폐업을 결정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냥 지나가지만 말고 그전에 들러서 물건을 좀 사볼걸..잘 지내시냐고 안부라도 챙겨 볼걸' 하는 후회를 잠시 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건 말건 편의점 주인 아저씨는 떠나 버렸고, 당분간 그 자리는 어두운 채로 남게 되었다.


'서로의 집에 있는 숟가락 젓가락 갯수까지 아는 것' 이 예전 동네 인심이라고 한다. 사실 나는 그런 식의 과한 간섭과 오지랖이 참 싫었고, 그래서 한 곳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내가 내키지 않으면 이웃과 전혀 교류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도시생활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매일 아침 출근 때마다 불을 켜고 어두운 겨울 아침을 환히 밝혀주던 편의점에 불이 꺼져 있어 내 출근길이 조금은 더 어두워진 것도 기분 탓일 것이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 편의점에 불이 켜지고 내 아이들이 어릴 적 모습으로 돌아가 과자며 초콜렛, 기프트 카드 등을 사달라고 조르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저씨가 가게 문을 열었던 십사 년, 그리고 우리가 여기 온 십 년은 내 생각보다 제법 두터운 시간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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