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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Mar 10. 2024

얼른 떨치고 일어나서 얼굴 한번 봅시다!

일상기록

지난 주였나, 남편이 오랜 친구에게서 받은 문자를 하나 보여 주었다. 남편의 친구는 남편에게 다른 친구와 함께 자기를 좀 보러 집으로 와달라고 청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술 한잔 하자는 것도 아니고 집으로 오라고? 나는 남편에게 이 분 어디 아픈 거냐고, 왜 집으로 오라고 하는 거냐고 물었는데 불행히도 그게 사실이었다. 남편의 친구는 암 말기로 고통받고 있었고, 이미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까지 된 상황이라고 했다.


그 친구분과는 나도 안면이 있었기에 정말 놀라고 말았다. 남편은 나와 사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는데, 그 친구도 나를 소개받은 이 중 하나였다. 그 친구는 키가 작은 편이었지만 눈매가 제법 날카로웠고, 말투는 시니컬했지만 친구들 중 누구도 그 말투에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른 이들은 그를 놀려먹으며 재미있어했고, 나는 그런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이들의 우정에 나도 한 자리 차지한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남편을 만났을 때 나는 대학 4학년이었는데, 졸업 후 취직한 회사에서 뜬금없이 회계 일을 맡게 되었다. 전공이 법학이었고 경영이나 경제, 회계 쪽은 아예 관심도 없던 나에게 대차대조표는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공식이나 마찬가지로 해석 불가한 것이었다. 차변 대변 어쩌고 하는 용어를 보고서 '대변이라니' 하고 속으로 킥킥대기도 했지만 그 '대변'은 얼마 안 있어 나에게 '대변 불통(변비)'의 고통을 가져다 줄 만큼의 스트레스가 되었다. 나의 직속 과장은 대차대조표를 처음 본다는 나를 심하게 미워하고 질책했다. "너 고등학교에서 상업도 안 배웠냐?"라고 닦달하는 그에게 나도 반발심이 일어 쏘아붙였다. "안 배웠어요. 저희 학교는 가정 가사 가르쳐서 저 바느질하고 요리 배웠어요!"


아무튼 그대로 있다가는 과장에게 들볶여 죽을 것만 같던 나는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고, 남편은 이 친구를 불러냈다. 그때 이 친구가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았다. 그는 바쁜 일정이었음에도 남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 주었고, 카페에서 몇 번인가 나에게 회계의 기초 지식을 알려 주었다. 그 몇 번의 강의로 내 '돌머리'가 뚫리지는 않았지만, 그 친구의 배려만큼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 고마운 것이었다.


그 친구가 말투만 차갑고 시니컬했지 속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건 남편이 말해준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바쁘시기도 하고 돈도 없어서 사발면 하나 사 먹을 돈만 가지고 가서 저녁을 해결해야 했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부턴가 밥을 꼭 두 개씩 싸오더라는 것이었다. 아마 친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남편의 상황을 말했을 것이고, 그 어머니가 그날부터 밥을 하나씩 더 싸서 친구 편에 들려 보냈을 것이다. 매일같이 밥을 한개씩 더 가져온다는 게 말이 쉽지 때로는 번거롭고 때로는 무겁고 그랬을 텐데.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내가 그 밥을 얻어먹은 것처럼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졌다.


그랬던 친구였기에 남편이 친구의 투병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라고 마음이 아팠을지 생각하니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비록 지금 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고, 게다가 현재 진료에 손을 뗀 의사들이 많은 상황이라 치료받기가 더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그 친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훌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건강한 모습으로 나와도 만나서 술 한잔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디 그 친구분의 일로 남편의 눈에서 눈물이 나는 일은 생기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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