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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Mar 17. 2024

동백꽃, 그리고 수선화

일상기록

'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수선화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빠가 꽃농사를 지으셨기 때문에 나는 어려서부터 다양한 꽃을 많이 접했다. 다섯 살 무렵, 제주도 어느 산중에 아빠가 가꾸었던 진한 황금빛 금잔화에 취하기도 했고, 지천으로 펼쳐져 있던 유채꽃밭 안에 들어가 나올 줄 모르기도 했으며 아빠가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서 잘라 놓은 튤립을 옮기다가 벨벳같던 꽃잎의 감촉에 홀려 넋 나간 듯 서있기도 하였다.  그 후로도 장미, 국화, 안개, 글라디올러스, 백합, 고데치아 따위의 꽃들이 우리 집에 터를 잡았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그러나 그 많은 꽃들은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난 수선화 앞에 모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수선화는 내가 열두 살 무렵, 아빠가 팔려고 심은 것은 아니었고 집 마당에 재미삼아 심었던 꽃이었다. 뭘 심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마당에 나가 보니 희고 노란 꽃이 퍽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지만 누군가가 쳐다보는 건 못내 쑥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떨군 채 피어있는 게 아닌가.

제주에서 유채꽃을 실컷 보고 자라서 한동안 노란색이 가장 좋았던 나는 일단 수선화의 색이 마음에 들었다. 자세히 보니 색은 물론이고 그 모양새가 상당히 곱고 정교했다. 하지만 수선화는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살짝 떨구고 있어서 여봐란듯이 고개를 당당하게 쳐들고 화려한 자태와 강한 향을 자랑하는 백합 같은 꽃과 겨루면 소리도 한 번 못 내보고 내가 졌소~ 할 것만 같았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수선화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아빠의 일 때문에 도시의 학교를 다니다가 한 학급에 두 반밖에 없는 시골 학교에 전학을 간 상태였는데 그곳 아이들의 위세와 행패가 이루 말할수가 없어서 상당히 고생을 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던 수선화의 모습이 마치 내 모습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수선화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정호승 시인의 시 '수선화에게'를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 안치환이 노래로 만들어 불렀을 때는 몇날 며칠이고 그 노래만 되풀이 듣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의 이런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좋아하는 꽃이라면 오직 수선화만 떠올리며 몇십 년을 살아오던 터에 나에게 한 가지 '사건'이 생긴 것이다. 작은아들 밍기가 아주 깜찍한 짓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작년이었던가, 밍기는 내 생일을 맞아 책갈피를 선물했다. 책을 좋아하니 잘 사용할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건넨 책갈피는 끝에 동백꽃이 장식으로 달린 귀여운 것이었다. 나는 그 선물에 무척 기뻤고, 동백꽃 책갈피는 한동안 나의 좋은 독서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책갈피의 생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엄마가 방을 치우시던 중 책갈피를 떨어뜨렸고 그 바람에 동백꽃 장식이 망가지고 만 것이었다. 꽃장식이 사라진 책갈피는 사용하기도 어중간해졌고 무엇보다도 아무 특색 없는 밋밋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책갈피는 자연스럽게 폐기되는 운명을 밟고 말았다.


그러다 올해도 어김없이 내 생일이 다가왔고 밍기는 나를 위해 뭔가를 주문했다고 했다. 며칠 전 밍기에게 뭔가 택배가 와서 이게 그것이겠거니 했지만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그리고 오늘 가족모임에서 밍기는 드디어 그 선물을 공개했다.

이번에도 밍기의 선물은 동백꽃 책갈피였다. 그런데 이전과 다른 건 이번 책갈피는 가위나 칼을 쓰지 않는 이상 망가질 수 없는, 실로 떠서 만든 물건이라는 점이었다. 이전에 선물한 책갈피가 망가져서 내가 속상해하는 것을 보고 이번에는 망가지지 않을 것으로 주문했다고 했다.


나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책갈피를 만져보며 밍기의 세심하고 다정한 마음에 눈물날 만큼 기뻤고 감동했다. 그냥 려 보낼수도 있었던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이렇게 따스한 감동으로 돌려주다니. 밍기가 아기였을 때, 녀석을 안고서 그 귀엽고 평화로운 얼굴을 들여다보면 그동안 겪었던 힘겨움과 서러움이 다 위로받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아무래도 녀석에게 이런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가보다.


나는 여전히 수선화를 사랑한다. 그러나 이제 누군가가 내게 좋아하는 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동백꽃, 그리고 수선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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