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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Feb 23. 2024

오지랖을 참다

일상기록

퇴근길 전철이었다. 왠지 눈이 부신 것 같아 주위를 보니 내 앞에 선 남자의 휴대폰 플래시가 켜져 있었다. 그걸 본 내 머릿속에는 순식간에 오만가지 상황이 시뮬레이션되었다.


남자의 휴대폰 불빛 때문에 내가 눈부시고 불편하니 그걸 꺼달라고 말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다소 '불량스러워 보이는' 인상이 그 간단한 일을 망설이게 했다. '내가 괜히 말 꺼냈다가 아줌마,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라며 되레 시비를 걸면 어쩌지' 라는, 필요도 없는 걱정이 마음을 지배했고 그런 생각을 갖고 보니 그 남자는 정말 그럴 것처럼 생긴 관상(?) 이었다. 마침내 나는 그에게 플래시가 켜져 있다고 말하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대신에 '휴대폰 들고 있는 각도를 보니 그래도 불빛이 내 눈에 완전히 들어오진 않네' 라며 자기위안을 하는 데에 신경을 쏟았다.


그렇게 결정하기까지 나는 내가 듣고 겪은 수많은 '오지랖 실패 케이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가는 사람의 가방이 열려 있다고 알려주자 고맙다는 말은 커녕 '뭐야 이건' 하는 표정으로 뭐 보듯 하며 가버렸다는 이야기, 지나가다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주자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손에서 낚아챈 후 제 갈길만 가버렸던 사람들, 양양 낙산사 들어가는 길에 있는 연못 난간 사이로 몸이 빠지기 직전의 어린아이를 붙잡아 주었는데도 '무슨 상관이야' 라는 표정으로 애 손만 잡고 가버렸던 부부.. 그런 행동들은 꼭 상대로부터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은 의도를 갖고 임했던 당사자를 힘 빠지게 하고 언짢게 하기는 충분하다. 하긴, 요즘같은 세상에는 가방 열린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도 "너 내 가방에 있던 지갑 가져간 거 아니야?" 라는 덤터기를 쓰지나 않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내가 자리에 앉은 채 계속 일어나지 않자(사실 그 남자는 자리를 잘못 잡았다. 나는 종점 거의 근처에서 내리는데) 남자는 좀더 내릴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할머니 앞에 가서 섰다. 그런데 남자가 앞에 서자마자 할머니가 말하는 게 아닌가. "휴대폰에 불 켜졌어요"


나는 내가 한 것과 같은 쓸데없는 잡걱정을 사서 하지 않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할머니의 심플함이 부러웠다. 그 할머니는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이런저런 경험이 더 많을 것이고, 당연히 내가 겪은 것과 같은 일들도 더 많이 듣고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알려줘야 할 일이 있을 때 할머니를 망설이지 않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부러움도 잠시, 아마 나는 같은 일이 또 생겨도 별별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해 보며 달싹거리는 입을  주저앉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세상은 참 냉정하고 무서운데다 요지경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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