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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Sep 07. 2021

함께 나이 들어가는나의 인형

함께 행복하게 나이 들어가자

몇 달 전, 유퀴즈에 "추억을 치료하는 인형병원장" 편이 방송된 적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낡고 헤진 인형을 고쳐주는 (치료해주는) 인형 병원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날 그 방송을 본 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랍고도 반가웠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 1-2학년 때쯤이었을 것 같다. 아빠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동생과 나에게 하나씩 곰인형, 생쥐 인형을 선물해주었다. 이름은 각각 곰순이, 쥐순이라고 지어줬다. 많은 인형들이 있었지만 쥐순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이었다.  

애착 인형은 아동기에 안식처의 역할을 해준 양육자의 상을 대신하는 대상을 의미한다. 이 대상이 인형이나 이불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대부분은 부드럽고 푹신한 인형이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주로 아동기에 이용되지만 종종 그 흔적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남는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까지도 그 인형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어릴 때는 놀이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는데, 항상 가까운 곳에 두고 오랜 시간 지내다 보니 어른이 되어서부터는 쥐순이가 마치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와 같이 느껴졌다. 가끔 너무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온 날이면, 가만히 앉아있는 쥐순이가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그저 인형일 뿐인데 무슨 인형이 위로를 해준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정말로 그랬다. 남들이 보기엔 털도 많이 빠지고 낡은 인형이라 안 예뻐 보일지 몰라도, 최소한 나에게는 가장 귀엽게 보였다. 


유 퀴즈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은 단순한 인형이 아닌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나이도 30이 넘은 성인이 이렇게 애착을 가진 인형을 갖고 있으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시선을 의식했던 것도 사실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이라면, 내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일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인데, 방송을 보면서 그동안 부끄러워할 일도 참 많았다 싶었다. 


그렇게 애착을 가지는 인형일수록 손이 많이 타기 때문에 세월만큼 인형은 많이 헤지고 낡게 된다. 털도 많이 빠지고 어떤 부분은 솜이 많이 죽어서 빈약해지기도 했다. 볼 때마다 내가 너무 좋아해서 인형이 아프구나 싶어 항상 슬프기도 했다. 내 인형도 치료할 수 있을까 싶어 한번 인형 병원 사이트를 찾아가 봤다. 

사이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올린 의뢰 글이 있었는데, 읽고 있으니 마음이 이상했다. 


“내 친구 토순이를 치료해주세요”

“제22살 소중한 친구입니다”

돈이 얼마 들어도 상관없으니 내 오랜 친구를 치료해달라는 간절한 글과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너덜너덜하고 색이 바랜 인형들의 사진을 보고 여러 가지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대화, 맛있는 음식 등 세상에 위안받을 거리는 많지만 때로는 혼자 있는 시간에 이유도 모르게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던 것이 이 애착 인형이었던 것 같다. 작고 낡은 인형이지만 불안한 삶 속에서 나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요즘 들어 시간이 흘러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을 가끔 생각해본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지만, 30대 중반이 된 후로부터는 나의 하루도 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흘러가는 시간도 예전보다 훨씬 더 아쉽게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날에는 잘 정돈된 주변과, 그래도 열심히 살아왔던 나의 삶, 내가 소중히 여겼던 물건들, 내 옆에서 항상 나를 편안하게 해 준 인형. 모두 내 옆에 예쁘게 놓여 있으면 좋겠다.

살아가는 동안 함께 행복하게 나이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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