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믕딤 Jun 12. 2024

당당하게 횡설수설하기, 어쩔 수 없이 헛소리하기


지금의 나는 말을 정말 못 한다. 발음도 어눌하고, 목소리도 떨리고, 말을 하다가 횡설수설 길을 잃는다.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중간으로 갈수록 혼란 표정을 짓는다. 내가 긴장하고 있고, 혼미해지고 있다는 걸 쉽게 눈치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이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럽더니, 이제는 그냥 당당하게 횡설수설한다. 전화할 때는 메모장에 대본을 적어 말을 하고, 업무적으로 보고를 해야 할 때면 스크립트를 노트에 쭉 적어서 노트에 코 박고 설명한다. 근데 그래도 못한다. 어쩔 수 없이 헛소리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노력이 가상하므로, 주위에서 내가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딱히 뭐라고 하진 않는다. 어쩌겠어. 핸디캡이 있으면 두 배 노력해야지.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선택적 함구증이 있었다. 집에서는 누구보다 말을 잘 하지만, 학교에 가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1년 내내 반 아이들이 내 목소리를 모를 정도였고, 말을 못 하는 애인줄 알 정도로 말을 안 했다. 나는 낯선 사회적 상황이 오면 입을 다물어버리는 전형적인 내성적 인간이었고, 조금은 병적인 수준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가 3~4살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아서 말을 못 하는 애인줄 알고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차 뒷시트에 앉아서 동요를 소리 내지 않고 뻐끔뻐끔 열창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조금 안심했다고 한다.(안심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어렸을 때 말을 하도 안 해서 내 발음이 지금 이렇게 어눌한가? 약간 퇴화가 된 거지 그때.     


맞아. 그런 것 같기도 해.     


분명 내 말에 동의하는 건데 기분이 나쁜 건 기분 탓인가. 적어도 언어 퇴화급으로 어눌한 건 아니라고 엄마만큼은 토닥여줘야지. 아무튼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발화하는데 문제가 있었고 점점 학급생활을 해나갈수록 말도 하고 친구도 사귀면서 호전되었다. 중학생 때내 언어적 전성기였는데 그때는 학급시간에 연극을 해도 연기대상을 받을 정도로 전달력이 좋았다. 친구들과 소통하는데도 거침없었고,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랬던 중학생 시절을 탈주해 버리면서 정말 심각한 언어적 퇴화가 시작된다.      


나는 대학에 가기까지 홈스쿨링을 했으므로 집단에 소속된 적이 없었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사람과 직접적인 언어로 소통해야 할 상황도 적었고, 우리 집도 그렇게 대화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중학교 친구들과도 만나는 것 대신에 주로 네이트온이나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 글자로만 몇 년 동안 대화하니 발화 능력이 아예 없는 수준에 다다랐다.   


문제는 대학 입학에서부터 일어다. 년간 사회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이, 갑자기 예술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와도 같았다. 왜냐면 예술대학은 과에 마다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집단문화가 가장 강조되는 곳 중에 하나였다. 동기들과의 유대가 중요하고, 선배들과의 관계도 중요했다.


당연히 나는 다 말아먹었다. 일단 대화할 기회가 생기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어있었고, 누가 봐도 불편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말도 웅얼웅얼한다고 욕먹고, 표정이 없다고 욕먹으며 선배들에게 갈굼 당하고 난 뒤에는 트라우마가 생겨버렸다. 그래서 조금만 압박되는 상황이 생기면 안 그래도 어눌한 발음으로, 주체를 못 하고 설수설하게 된 것이다. 조리 있고 자신감 넘치는 발표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냥 꾸역꾸역 말하다가 길을 잃고 헛소리하다가 어버버 하는 게 일상이니까.


물론 이런 언어적인 결함으로, 다소 사람이 허술해 보이고 멍청해 보일 수는 있다. 이런 문제들로 가끔 상대방이 답답해하고 짜증 낼 수는 있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순간인 햄버거를 시키는 데에는 문제없다. 그냥 대충 의사소통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으므로, 다 커버린 나는 이제 내 발화능력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사람들의 리액션으로 알게 될 때가 많다. 또 어눌하게 횡설수설 헛소리를 했구나.


어느 시기에 문제없이 소통이 원활하게 됐던 사람도, 사회생활을 몇 년간 생략하고 사람과의 대화가 극히 적어지게 되면 후에 심각한 언어 발화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나는 내 경험을 통해 알았다. 아무리 옆에서 말해줬어도 몰랐을 거다. 모든 건 원래 좆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사람 인생 그거 하나로 그렇게 쉽게 망하지 않는다. 횡설수설 헛소리를 하면서 또 대충 살아갈 수 있다. 그냥 그런 순간이 오면 그런 순간이 왔구나 한다. 역시 입을 다무는 게 제일 편하지만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팀장님, 제가 그렇게 비정상 같아 보이시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