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있잖아, 그거!”
집에서도 밖에서도 입에 달고 사는 문장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부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단어가 종종 떠오르지 않는다. 나만 그런 줄 알았지만 우리 나이 또래가 모이면 꼭 단어 하나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각 자 핸드폰을 꺼내 들고 찾기 바쁘다. 나이 들어 가는 일이 이런 모습이었던 걸까.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들. 애써 찾고 있지만 자꾸만 글자 오타가 난다. 그래도 대화가 통하니 신통 방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이 안 나네, 그 이름이 뭐더라?”
“그래, 나 알아. 뭐 말하는지.”
“찾아 봐 봐. 왜 그거 있잖아.”
“나 좀 봐. 계속 오타가 난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서글픈데 몸과 머리까지 말을 듣지 않으니 불공평하고 억울하기만 하다. 시간이 자기 멋대로 흘러가 버려 일어나는 변화를 감당하라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다. 세월이 흘렀음을 나에게 콕 집어 말을 해 주는 일은 바로 핸드폰 실종 사건이다. 매일 그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핸드폰은 사라진다.
“엄마 핸드폰 본 사람~”
이라고 말하는 일이 이제는 너무 자연스럽다. 방금 쓰고 있던 핸드폰은 돌아서면 자기 발로 숨어버린다. 핸드폰과 매일 숨바꼭질을 하며 집 안 곳곳을 헤매고 다니는 내 모습에 허탈한 웃음만 피식피식 새어 나온다. 냉장고도 열어보고 화장실도 가보고 거실, 방 이곳 저곳을 살펴 보아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예전처럼 집 전화기라도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으련만 지금 시대에 집에 전화기가 있는 집이 그리 흔하던가. 혼자 집에 있을 때는 난감하다. 외출을 해야 하는데 핸드폰을 찾을 수 없으니 ‘띠링’ 하고 문자라도 오면 너무 감사하다. 그 문자가 비록 어디에 투자하라는 광고 문자 일지라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길거리에서 열심히 얼굴을 두드리며 화장을 하는 고등학생이 예뻐 보이고, 짧은 치마를 입고 걸어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서 보게 된다. 그들의 싱그러움을 알고는 있을까. 10대, 20대의 빛나는 모습을. 무엇을 해도 열정적이고 힘이 나며 깔깔거리며 밤을 꼬박 지새워도 거뜬한 그 젊음이 지금은 부럽다. 그 때는 몰랐던 오렌지 같은 상큼함을.
나이가 들어가며 변하는 몸과 생각들이 그렇다고 싫지는 않다. 시간이 흘러 간만큼 못 보고 지나쳐왔던 주위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생겼으며,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어 좋다. 물론 지금도 후루룩 달아오르는 화를 다스리기는 더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겠지만 예전처럼 피하거나 숨거나 아니면 내지르지는 않는 단단함이 조금씩 생긴 것 같다. ‘어디 한 번 덤벼 봐.’ 이런 마음으로 주저하지도 않는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잘못했으며 어느 부분을 바로 잡고 고쳐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는 그런 나이, 불혹이 이제 인생을 보기 시작하는 나이가 아닐까.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 뭐? 아, 그거.”
오늘의 대화도 이렇게 시작해서 이렇게 끝이 난다. 서로 조금씩 변하는 모습들을 보며 짜증을 내거나 비웃거나 그러지 않는다. 우리 모두 그렇게 나이 들어가고 있음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 일거라 생각한다. 서로 다르면서 또 서로 비슷하기에 20대의 낄낄거렸던 모습 그대로 그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는 40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