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에피소드 1 : 첫째
누구에게나 처음을 마주하게 되는 첫째는 소중하다. 모든 일이 모두 처음이라 소중하고 조심스럽고 온갖 정성과 사랑을 쏟는 것 같다. 나에게도 첫째는 그랬다.
따뜻한 햇살에 졸음이 쏟아지는 봄. 회사 책상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날이 종종 생겼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 아예 엎드려 자는 일도 있었다. 처음에는 춘곤증인 줄 알고 역시 봄이라 잠이 쏟아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임신 사실을 안 사람은 옆에 아이가 둘이 있던 선생님이었다. 다행히 입덧이 없어서 남들처럼 여러 달 고생한 일은 없었다. 지금도 같이 일하면서 먹고 싶은 거 잔뜩 챙겨주었던 선생님들이 고맙다.
한 번은 만삭 때 일이다. 청소하시는 분이 물걸레로 어찌나 열심히 바닥을 닦으셨는지 주욱 미끄러져서 넘어졌던 일이 있었다. 나는 정말 부끄러웠는데 주위 사람들은 나보다 더 놀라고 걱정을 해 주었다. 발레 하 듯 벌어지지도 않는 다리가 앞뒤로 쭉 뻗은 모습이 얼마나 웃겼을까. 그것도 만삭의 배를 하고. 물론 배가 땅에 부딪혔으면 큰일 날 뻔한 사건이었지만 다행히 중심을 잘 잡아 안전했다.
첫째 임신으로 나의 첫 승진 기회와는 ‘안녕’을 고하는 쓴 잔을 마시기도 했다. 그래도 매 끼니를 같이 먹고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보냈던 동료들에게 더 고마웠다. 임신 기간 동안 별다르게 힘들어하지 않으니 남편은 쉽게 아이를 갖고 아이를 낳는 건 줄 안다. 그래서인지 임신 기간 동안 내내 서운했다. 이 감정은 결혼 10년이 넘어가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혹시 아내가 임신 중이라면 이때만큼이라도 많이 아주 많이 잘하시라고 조언하고 싶다. 나중에 아내의 원망을 듣고 싶지 않다면…
첫째는 12시간 진통 끝에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진통은 아무리 경험담을 들었어도 직접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아픔이다. 첫째라 잔뜩 겁먹고 있었다. 진통이 조금 오자마자 병원에 갔다. 아, 죽을 만큼 아플 때 가는 건데 라는 후회가 밀려왔다. 가만히 누워서 겪는 진통은 견디기 정말 힘들다. 진통으로 하늘이 노란데 자꾸 들어오는 내진. 무통 주사는 또 너무 일찍 맞아 두 시간도 안돼 다시 찾아오는 진통. 힘을 주고 싶은데 마음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아 눈 핏줄까지 터지고야 만다. 역시 아기가 배 속에 있을 때가 가장 좋다는 주위의 말이 맞았다.
첫째는 태어난 지 이틀 만에 황달로 신생아 실에 입원 해 엄마와 생 이별을 해야 했다. 치료만 잘 받으면 일주일 만에 태원 할 수 있는 비교적 가벼운 병이다. 하지만 그때는 아이가 잘못되는 줄 알고 아가가 집으로 오기 전까지 매일매일 눈물로 지냈다. 물론 몸조리는 못했다. 드디어 퇴원! 집에만 오면 정말 좋을 줄 알았으나 제대로 안지도 엎지도 못하는 초보 엄마와 신생아는 하루 종일 울지 않기 씨름을 했던 것 같다. 조리원에 가지 않아서 다른 또래 아이는 어떤지 몰랐다. 아기가 보통 아기들 먹는 양의 두 배를 먹어도 계속 더 달라고 보챘다. 또 많이 먹으니 하루에 큰 일만 8번 이상을 해 기저귀를 갈고 아기를 씻기고 또 먹이고 재우 고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었다. 운 좋게 친정 엄마와 함께 육아를 해 아이 옷 빨래(모두 손빨래를 했다.)며 이부자리며 그밖에 음식 등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엄마도 나와 동생을 나았지만 오래전 일이라 아기 돌보는 법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당황스러운 이 기분은 뭘까. 특히 아기를 씻길 때 덜덜 떨었다. 혹시나 떨어뜨릴까 봐 너무 무서웠다. 혹여 감기라도 들면 큰 일이니 물 온도 재고 욕조를 방에 끌고 와서 씻기고 다시 정리하면서 아이를 씻겼다. 수많은 질문들이 있었지만 바로바로 해결도 할 수 없었다. 지금처럼 SNS가 활발하지 않은 때여서 답변을 얻으려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도대체 왜 자지 않는 거지? 왜 이렇게 많이 먹는 거지? 언제쯤 돼야 애가 잠을 세 시간 이상 잘까? 매일 엎어서 재워야 하는 걸까?
한 번은 목욕을 시키고 나서 로션을 발라주고 있었다. 그날따라 아이 배가 너무 커 보였다. 단지 많이 먹어서 배가 불러 있었던 것 같은데 바로 병원으로 향했던 초보 엄마 시절이 떠오른다. 이상하게도 첫째 때는 아이를 번쩍 한 팔로 안고 있을 힘이 없었다. 아기띠를 전혀 멜 수가 없어 아기띠는 아빠가 항상 메고 있었고 엎는 것은 친정 엄마 몫이었다. 둘째 때는 한 손으로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로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었는데 왜 첫째 때는 그렇게 힘이 없었는지…
어린이 집도 보내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딱 3개월 다녔다. 또 모든 세상의 자연과 동물을 경험해 준다고 이곳저곳 정말 많이 데리고 다녔다. 이런 많은 혜택은 첫째에게만 주어지리라. 둘째 때부터는 조금 뜸해지더니 셋째 때는 여행 아니면 찾아다니는 일이 거의 없다. 미안해, 우리 딸.
배 속에서 아주 얌전히 가끔 발을 꾸욱 내미는 것 말고는 엄마를 편하게 해 주었던 첫째 임신 경험 때문에 둘째, 셋째 임신도 두렵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초보 엄마와 초보 아빠 사이에서 크게 아픈 적 없이 잘 자라주고 있어 고맙다. 거기다 첫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서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우리 큰 아들 없었으면 엄마가 동생들을 어떻게 돌 봤을까. 큰 아들이 옆에 있어서 엄마가 힘이 많이 되네.”
그냥 말한 진심이 아이에게는 굉장히 자랑스러웠나 보다.
“엄마는 내가 없으면 이것도 못할 뻔했지?”
하면서 매 번 도움을 청하면 책임감 있게 군소리 없이 한다. 이것도 첫째들만이 갖는 힘이 아닐까.
매 번 까불까불 촐싹거리는 마냥 아이인 줄 알았는데 가끔 생각 깊이 담아두고 마음을 쓰는 모습에 깜짝 놀란다.
친정 엄마가 한 말이 생각난다.
“네가 지금까지 가장 잘한 일 중에 하나가 첫째를 낳은 일이야.”
그 말을 다시 떠올리며 첫째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