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도시락 세대다. 야간 자율학습까지 하던 고등학교 시절에는 두 개의 도시락을 들고 학교를 오갔다.
매일 아침 부엌에 홀로 서고 나서야 나는 내가 들었던 도시락의 무게를 깨닫게 되었다.
엄마가 된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급식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아침밥을 하며 홀로 새벽을 오갔던 엄마를 생각했다.
연애시절 남편은 데이트에 내가 싸간 도시락을 유난히 좋아했었다. 그저 나에 대한 사랑으로 그가 그렇게 환하게 웃어주는 줄 알았다. 결혼 후에야 남편에게 도시락이 어떤 의미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관계는 세월이 갈수록 조금씩 더 깊어진다. 엄마가 되고 아내가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일이다.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바쁘신 분이었다. 평생을 맞벌이를 하셨기 때문에 남편의 도시락은 늘 쓸쓸했다고 한다. 김치나 참치캔이 주를 이룬 도시락을 남편은 점심시간이 오기 전에 비웠다. 맛없는 반찬을 싸 온 날 친구의 맛있는 돈가스 반찬을 집어먹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도시락은 곧 아이의 자존심이다.
남편은 도시락이야 말로 그 아이가 얼마나 그 집에서 중요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척도라고 했다. 그 말을 이어가는 표정이 얼마나 쓸쓸해 보였는지 마치 남편의 도시락을 받아 든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전업주부인 엄마를 둔 덕에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유년시절을 보냈다. 내게 도시락은 그저 따뜻한 추억 속에 존재하는 엄마의 사랑이었다.
결혼 후 잠시 낯선 땅에서 외국살이를 할 때 회사 앞 한인 식당의 모든 메뉴에서 라면 수프 맛이 난다는 말을 듣고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었다. 당시 낯선 이국땅에서 돌쟁이와 세 살배기 아이를 둔 나로서는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새벽에 잠이 깬 아이를 아기띠에 둘러업고 나는 새벽밥을 지었다. 반찬은 세 가지 정도에 따뜻한 국도 넣었다.
퇴근한 남편은 빈 도시락을 건네며 그날의 반찬이 얼마나 맛있었는지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얘기해 주었다. 하지만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그만 싸라고 아침마다 말리기 시작했다. 재밌는 것은 그만 싸라는 그 말이 나에게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나는 그 이른 새벽에 번쩍 눈을 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늦은 밤 공부하는 아이에게 해줄 말은 더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닌 그만 자라는 말이다.
나는 더 맛있게, 더 예쁘게 싸주고 싶어졌다.
십 년이 훌쩍 지난 후에도 남편은 가끔 그 도시락 이야기를 한다. 그럴 때면 내가 그때 이겨낸 수많은 새벽의 졸음들이 참 뿌듯하게 느껴진다.
남편의 학창 시절 도시락이 아내의 도시락으로 바뀔 수는 없지만 남편의 쓸쓸했던 도시락 이야기가 따뜻하게 끝나서 안도했다.
결혼을 하고서야 알았다. 내게도, 남편에게도 평생을 따라다니는 어린 내가 있다는 것을
아이를 키우며 불쑥 나타나는 그날의 그림자가 혹은 그날의 행복이 얼마나 또렷한지 종종 당황스럽다.
그리고는 이내 그래서 두려워진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그림자와 빛을 남기고 있는지
평생을 따라다닐 결핍을 남기게 될까 봐 겁이 난다. 아이는 생각보다 오래 기억하고 생각보다 오래 추억한다. 별거 아닌 따뜻했던 순간이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사랑한다면 사랑을 품고 있지만 말고 넘치게 담아야 한다.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그저 독백이다.
도시락이 사랑의 척도는 결코 될 수 없다. 나 역시 생활이 버거웠다면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아이에게 쓸쓸한 도시락을 들려 보냈을지도 모른다. 도시락의 무게가 결코 사랑의 무게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이의 마음속에 무엇으로 남게 될지는 엄마인 내가 정할 수 없다.
내가 준 기억이 내 사랑과 다른 이름으로 남게 될까 봐 나는 오늘도 나를 살피고 너를 살핀다.
발이 쑥쑥 자라 몇 번을 못 신고 새 신발을 사는 큰 아이 때문에 둘째는 중학교에 들어와 매번 헌 신발을 물려받았었다. 새것 같은 운동화라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늘 형은 새것만 가진다는 둘째의 말에 에어 조던 농구화를 한 켤레를 샀다.
아이가 환하게 웃는다.
농구화가 아이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