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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전 열한시 Dec 08. 2021

보이지 않았던 것들

언젠가부터 어릴 때 찍은 사진 속 큰 아이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분명 웃는 얼굴의 사진인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싶어 남편에게도 슬쩍 물어보니 남편 역시 그렇다고 했다.

둘째가 태어나고부터의 사진들이다.

아이들이 내 키를 넘기고 나니 꼬물거렸던 어릴 적이 더 자주 그리워진다. 그럴 때면 지난 시간들을 담은 사진과 영상들을 다시 보곤 하는데 지겨울 만큼 돌려봤던 장면들 속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라는 여름만이 계속되는 작은 나라에 살던 시절이었다. 주말이었고 우리 가족은 아파트(콘도라 불리는) 수영장에서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과 남편을 캠코더에 담고 있었고 화면 속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남편은 돌쟁이인 둘째를 보행기 유모차에 앉혀 곁에서 돌보고 있었고 큰 아이는 혼자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큰 아이는 자꾸만 물을 튀기며 둘에게 다가갔다. 나도 남편도 그런 큰애를 제지하기에 바빴다.

“하지 마 애기 물먹는다고”

화면에는 보이지 않지만 날카로운 목소리의 나다. 남편은 그런 둘째를 보호하기 위해 등을 돌렸다. 그때의 나는 ‘왜 아기에게 자꾸만 물을 튀기지?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그 생각뿐이었다.

큰 아이는 앵글의 중심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의 시선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물을 튀겼던 것일 텐데 젊은 부모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이는 온몸으로 나를 보아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영상 속에서 나는 연신 둘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 첫째는 그저 배경이 된다.

둘째를 담고 있는 영상 속 뒤편에서 큰 아이가 춤을 춘다. 내가 한 말들과 행동들이 부끄러워서 화면이 일순간에 일렁일렁 흐려졌다.


또래보다 키도 컸고 유독 말도 글도 빨랐던 아이였다. 모든 것이 빠르다고 마음마저 빠르진 않았을 텐데 나는 너를 너무 바삐 키워버렸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다.

아기 잔다고

아기 다친다고

고작 세살이 더 많은 너는 어른이 되어야 했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너는 나의 전부였다. 둘째에게는 주지 못했던 긴밀한 사랑을 듬뿍 주었다. 너에게로만 향했던 엄마의 시선이 나눠지던 날 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초보 엄마는 참 초보스러웠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화면 속 젊은 엄마는 한없이 얕았다.

초보운전이라고 당당히 써붙이고 핸들만 꽉 잡고 옆도 못 보고 직진 중이었다.

너는 심부름도 참 잘했고 혼자 책도 참 잘 읽었다. 종이접기 책을 보고 어려운 종이 접기도 한 상자씩 접어냈다. 그렇게 혼자서도 잘 해내는 너를 늘 자랑스러워했다.

사진 속의 너는 동생도 업어주었고 책도 읽어주었다. 그럴 때면 나는 네게 칭찬을 담뿍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너는 너로서 더 사랑받아야 했다.


쓸쓸했던 아이의 눈빛이 이제야 읽힌다. 작디작은 너의 모습이 이제야 보인다.

너는 외로웠을까?

너를 외롭게 했을까?


이렇게 뚜렷이 보이는 것이 왜 그때는 그토록 보이지 않았을까?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화면 속 젊은 엄마가 부끄럽다. 더 많은 것들이 보일까 봐 서둘러 영상을 끄고 멍하니 한동안 앉아있었다.


너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내게 처음으로 엄마라는 이름을 선물해 주었고 엄마로서의 모든 처음을 내게 주었다.

어떤 사랑도 저울로 가늠할 수는 없다. 내 사랑이 어디로 기울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첫째를 사랑했고 둘째를 사랑했다. 하지만 나는 너의 쓸쓸함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보듬어주지 못했다.


이제는 내 키보다 큰 너를 나는 가끔 ‘아가’라고 부른다.

너무 일찍 아가라는 이름을 뺏겼던 너는 그 말을 듣고 쑥스러운 듯 웃는다. ‘뭐야?’하는 표정 속에 행복이 묻어난다.


너무 빨리 형이 되어버린 너

너무 빨리 엄마 품을 내어줘야 했던 너

그리고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너


돌아가 그 시간을 다시 담을 수만 있다면…….

너와 함께 신나게 물장구를 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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