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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아 Apr 21. 2016

D, 오늘은 잡지 한 권을 샀어.

어쩌면 아직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따뜻할런지도 몰라.

안녕, D!

 우리 집 근처에는 지하철 역이 있는데, 내가 그 앞을 지날 때 마다 항상 빨간 조끼를 입고 제자리를 지키고 계시는 분이 계셔. 바로 <빅이슈 Big Issue>라고 불리는 잡지를 판매하는 '빅판(빅이슈판매원)' 분이야.


 <빅이슈> 잡지는 홈리스 분들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영국에서 처음 시작한 잡지래. 경제적으로 그분들이 자립하고, 다시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지. 처음에는 나도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던 분들인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괜히 한 번 더 눈길을 보내게 되더라고. 그러다가 학교 근처 빅판 분께 몇 번 잡지를 사곤 했는데, 휴학을 하고 나니까 학교 앞 역에는 갈 일이 없더라구. 그래서 집 근처에 있는 역에 갈 때 사는 편이야.

 내가 처음 그 분께 잡지를 샀을 때는 겨울이었어. 사람들은 거리에 별로 안 나오던 때였고, 추운 날씨만큼이나 그분의 표정도 얼어 있었어. 약간 위축된 모습과 더불어서 말이야. 내가 다가가서 잡지를 하나 사니 '감사합니다' 인사와 함께 그제야 얼굴이 풀어지셨어.


<빅이슈> 신간입니다!


 그리고 벌써 2016년 4월이 되었어. 봄, 따뜻한 계절이 와서 그런지, 아니면 사정이 아주 조금이나마 나아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 표정에도 봄이 온 것만 같았어.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표정에, 횡단보도를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번씩 이렇게 외치시는 모습에 오늘도 가서 한 권을 샀지. 5천원이라는 싼 가격에, 보름마다 새로운 유명인들의 사진으로 표지를 여는 빅이슈를 보는 재미는 꽤나 쏠쏠하거든.




 나는 그분들이 참 멋진 분들이라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자신이 '홈리스'임을 인정하고,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한 발을 떼야한다는 거거든. 이전에 빅이슈와 관련된 어떤 기사에서 봤는데, 실제로 빅판 분들께서 처음 빅판이 될 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고 하시더라고. 빅판이 되어 빨간 조끼를 입는다는 것은, 자신이 홈리스임을 만인에게 알리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는 분들도 계셨어. 그 다음으로 힘든 건, 빅이슈 잡지를 들고 거리에서 몇 시간 동안 서있는 그 시간.

 맞아, 지금 눈 앞에 빅판 분이 한 분 서계신다면, 그 분은 거리 위에 설 용기를 내신 분이기도 하고, 더불어 몇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지키며 미소짓는 인내심을 가지신 분인 거야. 그 어찌 멋지지 않다고 할 수 있겠어?


 사람들에 상처받고 거리로 나서야했던 그분들. 다시 세상을 마주하고 거리 위에 섰을 때 놀랍게도 그분들께 힘이 되었던 건 다름아닌 사람들이었다고 해.


지나가는 행인들이 낯선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하지만, 때론 독자들이 “힘내세요!”  한 마디 격려도 해주고, 추운 겨울엔 따뜻한 손난로를 건네주기도 하고,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와서 구매해가는 어머님, 힘내라며 빵과 음료수를 사다 주는 사람도 있다.


“요즘 세상에 흉측하거나 정에 굶주린 뉴스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거하고는 정반대되는 세상을 빅이슈를 통해서 바라볼 수 있어요.” (임형근, 종각역 5번 출구 빅판)


 나는 빅판 분께 손난로도, 빵이나 음료를 건네지도, 심지어는 아주 잠깐의 시간을 내어 몇 마디 말을 나눌 수 있는 만큼의 붙임성은 없는지 그저 매번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한 마디와 신간 하나를 사가는 것이 전부였는데, 어쩌면 세상엔 나보다 훨씬 커다란 따뜻함을 지닌 분들이 많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D, 어쩌면 아직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따뜻할런지도 몰라.

 집 앞 역의 빅판 분, 그분의 표정에 봄이 온 것도 다름아니라 그 따뜻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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