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멜리아 Apr 27. 2016

4월 27일과 단수

나와 동생의 작은 욕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안내드립니다. 오늘은 수도관 및 물탱크 청소가 있는 날입니다. 오전 8시 반부터 단수가 될 예정이오니 세대원들께서는 미리 대비하시어, 생활에 불편함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오 세상에.

경비실의 안내방송에 눈을 떴다. 오늘 오전 동안 단수가 된다는 안내방송이었다. 곧이어 엄마가 욕조에 물을 받는 소리가 났다. 나는 시간이 꽤 지나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릴 적부터, 이렇게 단수가 되는 날은 곧 동생과 물놀이하는 날을 의미하기도 했다. 화장실이나, 손 씻는 등에 불편함이 없도록 이런저런 용도로 욕조에 물을 받아두고 쓰다가, 단수가 끝나고 저녁을 먹기 직전 즈음에는 물을 고스란히 버리지 않고 그 욕조 안에 동생과 내가 들어가서 물놀이를 한참 하기도 했다.


몸을 일으켜서 세수를 하려고 보니 이미 단수가 되어있었다. 엄마가 한참 물을 틀어두었던 욕조에는 물이 찰랑찰랑 차있었다. 한 바가지를 퍼서 세수를 했다.


물장구를 치는 동생과 나는 욕조에 한 번 들어가면 두 시간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어른들이 '이제 그만 하고 나와라!' 하고 말할 때 까지, 한참을 욕조에서 안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거하게 물놀이를 하고 나면 배가 심하게 고파져서 평소보다도 저녁을 거하게 먹고 새근새근 잠이 들곤 했다.


세수를 하고나서, 물을 냄비에 끓여 아침맞이 메밀차 한 잔을 우려냈다. 천천히 노란 빛으로 우러나는 메밀차를 보니, 그때의 생각이 진하게 우러났다.


우리에게 필요한 장난감이나 도구는 딱히 없었다. 동생은 내가 아주 조금씩, 열심히 용돈을 모아서 생일 때 사주었던 만 원짜리 강아지 인형을 거의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는데, 우리는 그 인형과 더불어 레고 인형 두세 개와 손수건 몇 장을 가지고 들어가서는 그렇게 열심히 놀았던 거다. 몸을 좌우, 앞뒤로 움직여 작은 물보라를 만들어내면, 그것은 곧 우리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풍이 되어 손수건 배와 레고 친구들을 덮쳐 무인도로 보내곤 했다.


운동을 했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자 찝찝해서 바가지에 물을 받아가며 샤워를 했다. 이런 식으로 샤워한 것은 참 오랜만이었다. 가뿐한 기분으로 욕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물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시 언제 끊길지 모르니 경비실 방송이 나올 때까지 욕조의 물은 그냥 두기로 했다. 다시 차를 우려내 따라서 마시며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한창 점심을 먹고 있는데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누나, 단수 됐다매? 지금 물 나와?"

"어 나와."

"누나 나 집 가기 전에 빨리 씻어. 나 집가면 씻어야 돼."

"이미 씻었다~ 어여 와."


몸집 작은 아이 둘에게는 그 어떤 호화로운 수영장보다도 그 조그만 욕조가 재미있었다. 그러나 물놀이는 동생이 다섯 살,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끝이 났다. 더 이상은 욕조가 우리 둘의 몸을 모두 담글 정도로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생과 나 사이에는 엄마아빠는 모르는 둘만의 코드 비슷한 게 있었다. 동생은 지금은 어느새 머리가 커져서, 가끔씩 자기가 무슨 세상사에 모두 통달한 사람인 양 행동하면서 네 살 밖에 차이 안 나는 나를 구세대 취급하기도 한다. 그 때의 그 코드는 많이 흐려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까지도 동생은 엄마아빠에게도 말하지 않는 것들을 나에게는 가끔씩 말해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둘만의 비밀이 아직도 많다. 물론 둘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투닥거리며 싸운 기억은 그 비밀들과 둘만의 기억들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많다.



"경비실에서 알려드립니다. 수도관 청소가 완료되어 수돗물이 정상으로 공급되오니, 수도 밸브를 잠시 열어 녹물을 제거하신 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마개를 빼고 이제는 몸의 반만 담그면 꽉 차 버리는 욕조에 담긴 물을 버렸다.

아무래도 우리는 계속 이럴지도 모르겠다. 다시 전처럼 한번도 싸우지 않고 몇 시간동안 조그만 욕조에서 놀지는 못하겠지만, 때론 둘도 없는 친구로, 때론 둘도 없는 철천지 원수로 그렇게 지낼 것만 같다.


꼬로록 소리를 내며 욕조의 물이 모두 사라졌다.



Cover Picture by Ze Zordan


 개인적으로 '편지글'이라는 형식이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편하게 글을 적을 수 있어서 "D에게 쓰는 편지" 글을 쓰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글쓰기 초보인지라, 몇 번 적다보니 오히려 그 형식이 제 글을 삼킬 때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썼다가 발행하지 못하고 담아두기만 한 글들이 점점 늘어가기에, "오늘과 그 무엇"으로 매거진 이름을 바꾸고 좀 더 자유로운 형식으로 글을 적어볼까 합니다. 가끔은 편지글로 글을 적는 날도 있겠지요.
 모쪼록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함을 전하며, 따뜻한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

─당신의 아멜리아로부터.
매거진의 이전글 D, 오늘은 잡지 한 권을 샀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