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를 돌보기 위해서는

돌봄과 사회적 정의의 상관관계

by 아멜리에최

오랜만에 친구이자 회사 동료와 점심식사를 했다. 그는 여섯 살 아이를 둔 아빠이기도 하다.


결혼하기 전 그는 취향에 맞는 좋은 옷을 사 입기도 하고 유일한 취미인 게임을 할 때 반응속도를 높이기 위하여 비싼 키보드에 투자를 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안부도 잘 챙기고 밥이나 커피도 잘 사던,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한동안 외벌이 생활을 하면서 조금씩 뭐랄까 생활에 치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갔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의 입학이 가까워지자 마음이 조급하다고 했다. 그가 그동안 수입의 절반 이상을 빚을 갚고 저축하는 데 쓰던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모아둔 돈으로 아이의 입학을 앞두고 집을 구매하려고 하는데, 교육환경이나 안전한 동네인지 여부, 동네의 생활수준(경제적 격차가 크지 않을 것)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다 보니 한정된 예산에서 조건에 맞는 집을 찾는 일이 어렵다고 했다. 또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 다른 아이에게 뒤처지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어 퇴근 후 한 시간씩 공부를 봐준다고 했다.

요즘에는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에너지가 없어서인지 자신이 신경을 쓰는 사람의 범주가 좁아졌다고 했다. 직장에서도 예전의 자신 같으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어떻게 하면 더 잘 해줄 수 있을지 고민했을 텐데 요즘에는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한다고 했다. 자신의 현실이 버거우니 범주 밖의 누군가 힘든 일을 토로하는 것에 대해서도 예전처럼 관대하게 수용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삶에서 여유가 사라졌을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세계를 좁히기 마련이다. 신경 써야 할 단위, 돌봐야 할 사람들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돌보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이런 이유로 사회 전반의 여유와 한 사회의 관대함이나 포용력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여기서 여유는 균등한 분배, 사회적 안전망의 확보 등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집세 걱정 없이 안정적인 주거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어느 동네든 아이에게 안전한 환경이 갖춰진다면, 아이들에게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교육이 주어진다면 어떨까. 걱정과 불안으로 소모되는 에너지를 자신과 다른 이들을 살피고 돌보는 데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페미니스트 철학자 에바 페더 커테이(Eva Feder Kittay)는 제2차 돌봄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영유아나 장애인, 노약자 같이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돌봄제공자에게도 의존성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그들이 제공해야 하는 돌봄노동으로 인해 시장에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거나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율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자가 될 수 없어 경쟁에서 뒤처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돌봄제공자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경제활동이 관여되어 있지 않더라도 돌보는 자에게는 타인이 아닌 스스로를 돌볼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에는 그런 시간이 주어지면 샤워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밀린 잠을 처리했는데, 아이가 커가면서 그 내용도 자아실현과 관련된 일들로 바뀐다. 마치 인간의 성장단계를 설명하는 매슬로우(Maslow)의 욕구 5단계를 체험하는 것 같다. 새로 태어난 아이와 새로 태어난 엄마가 비슷한 단계를 거쳐서 발전하는 걸까.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돌봄을 제공하고 있는 자들을 역설적이게도 엄마와 회사다. 역설적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자라면서 엄마로부터 내게 필요한 돌봄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특징이라는 자녀에 대한 높은 교육열에서 엄마도 예외는 아니었고, 대입을 잘 치르기 위한 모든 자원을 투자받았지만 정작 나는 사랑받는다고 느꼈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나의 선택이나 판단에 대한 지지나 응원도 없었다. 그렇게 쫓기듯 학교를 마치고 선택했던 회사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엄마는 일주일에 한번 아이를 하원시키고 아이에게 저녁을 차려준다. 그동안 나는 읽고 싶던 책을 보거나 쓰고 싶은 글을 쓴다. 그게 내가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식이고, 그렇게 다시 힘을 얻어 일주일을 살아낸다.

직장에서 최대 2년까지 사용할 수 있었던 육아기 단축근무가 1년 연장되면서 나의 직장생활도 9-6에서 다시 10-5로 바뀌었다. 육아휴직 후 복직하면서 바로 단축근무를 시작할 때와 달리 ‘정상근무’를 하다가 단축근무를 하니 그로 인한 변화를 실감하는 요즘이다.


가장 중요한 변화로 꼽고 싶은 것은 아이가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9시까지 출근해야 할 때는 제대로 식사하지 못하고 간단히 차 안에서 씨리얼 따위를 먹거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유치원에 가는 날도 많았다. 요즘에 아이는 잼 바른 토스트나 사과를 먹고 집을 나선다. 그래서인지 말라 있던 아이의 턱살에 살이 조금 붙었다.


또 아이를 덜 채근하게 되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부족한지 안 자겠다고 버티는 아이에게 신경질이 나거나 아침에 늦지 않기 위해 아이를 독촉하는 일이 줄었다. 아이에게 더 많이 미소를 짓고 부드러운 말을 사용한다.


개인적으로는 뭔가를 하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 회사 점심시간을 이용해 운동을 시작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닥친 일을 처리하는데 쫓기는 게 아니고 나의 일상을 내가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조금씩 되찾고 있다. 객관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근무시간은 줄어들고 처리하는 일의 양은 동일하니 직장일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 내에 일을 처리하기 위해 군더더기 같은 시간을 덜어내고 선순위에 놓인 일에 이전보다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동안 해야 할 일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조금이나마 해냈다는 느낌이 들면 주말까지 하루종일 부재한 동거인에게도 덜 신경질이 난다. 조금 더 친절한 어투를 말을 할 수 있고, 위로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조금 더 너그럽게 반응할 수가 있고, 하루종일 바깥 노동을 한 그에게 정성을 담은 요리를 해줄 수도 있다.

이런 고무적인 변화를 모든 사람들이 겪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들은 물론 홀로 살거나 누군가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이. 노동시간을 줄이고 스스로 또는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 동거인이 있든 없든 우리는 모두에게 기대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지금 보다 많은 여유가 허락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분명히 더 포용적이고 관대하고 친절한 방향으로 나아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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