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하는 불안의 시대, 소소하지만 확실한 기쁨

봄에는 씨앗을 심습니다.

by 아멜리에최

요즘 우리집 아침 풍경이 조금 바뀌었다. 아이와 나도 잠에서 깨자마자 달려가는 곳은 거실 창가. 그곳에 열흘 전 씨앗을 심어놓은 화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웃이 된 삼총사

어린 시절 외할머니댁에는 마당이 있었다. 잔디가 깔리지 않은 마당이라 봄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그 흙마당에 씨앗과 모종을 심었더랬다. 이맘때 시장에 가면 파릇파릇한 모종들이 거리에 나와 있었다. 해마다 구매했던 것들은 토마토, 고추 그리고 봉숭아였고 때론 가지나 수세미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호미로 흙을 파고 씨앗이나 모종을 심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씨앗을 심을 때는 씨앗이 숨을 쉴 수 있게 흙을 살살 덮기. 모종을 심을 땐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살살 빼기. 그리고 이 모든 건 햇볕이 누그러진 오전이나 저녁 시간에 하기.

한번은 늙은 호박을 먹고 남은 씨앗을 별 생각 없이 마당에 심었다가 씨앗이 무성한 넝쿨이 되고 노란 꽃이 피었다가 벌들이 웅웅하는 틈에 보석같이 작고 예쁜 호박이 맺히는 경이를 경험한 적도 있었다. 그 호박이 충분히 자라기를 기다려 저녁 준비하는 엄마에게 건네줬을 때의 뿌듯함이란. 아마도 어린 내가 처음 느꼈던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모종과 씨앗을 심고 나면 매일이 기다림과 설렘의 연속이었다. 새순들은 하루도 그 전날과 같은 모습인 날이 없었다. 매일 조금씩 자라고 조금씩 굵어졌다. 소나기가 오거나 장마철이 되면 새싹들이 다칠까 봐 우산을 씌워 주었고 넝쿨이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막대기를 꽂아주면서 봄과 여름을 났다.


아이에게도 내가 경험했던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생각만 하다가 오 년이 지나버렸다. 마당이 없어서, 다른 일에 바빠서, 라고 핑계만 대다가는 아이의 유년 시절도 훌쩍 지나가 버릴 것 같아서 삼월의 셋째 주 일요일, 아이의 손을 잡고 꽃집에 가 씨앗을 찾았더니 사장님이 외치는 게 아닌가. 씨앗은 다이소에서! 없는 게 없는 다이소라지만 씨앗도 다이소라니. 예전엔 시장 꽃집에서 살 수 있던 씨앗을 다이소에서 구매하려니 기분이 좀 안 나기는 했지만 아이는 씨앗을 심는다는 생각에 들뜬 얼굴이었다.

내가 고른 고수, 바질과 아이가 고른 오이와 토마토. 그리고 다이소에서 산 화분 키트에 들어있던 상추까지. 집에 돌아와 호미 대신 검지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고 씨앗들을 심었다. 오이씨가 가장 크고 길쭉했으며 상추씨와 바질씨는 매우 작아서 집는데 애를 먹었다. 아이는 서툴지만 또박또박 씨앗들의 이름을 나무막대에 적은 다음 제 자리에 꽂았다. 너무 오랜만의 농사라 절반의 기대와 절반의 긴가민가하는 마음이 들었다.

삼월 둘째주 씨앗 심던 날

언제 싹이 날까 고대하면서 아침저녁으로 화분을 들여다보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는 잠에서 깨자마자 새싹을 확인하러 달려가더니 어느 날 소리를 질렀다. 엄마! 이것 좀 봐! 가보니 상추들이 단숨에 뾱뾱 한무더기 나있는 게 아닌가. 분명 그 전 날까지 감감무소식이었는데 간밤에 그렇게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거였다.


며칠 후 바질도 싹을 냈고 그다음 씨앗만큼 몸집이 큰 오이싹이 등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열흘 정도 지나자 토마토와 고수도 싹을 틔웠다. 씨앗 모양만큼이나 모습도 속도도 제각각이었다.

상추의 새순은 가느다랗고 멀대같아 콩나물을 연상시키는 반면 바질은 키가 작고 잎이 동그랬다. 오이는 씨앗처럼 떡잎이 커다랗고 줄기도 굵다. 토마토는 바질 다음으로 키가 작고 잎 끝이 뾰족하며, 고수는 상추처럼 키가 큰데 잎모양도 길쭉하다. 한번 싹을 틔우고 나니 다들 저마다의 모양과 속도로 쑥쑥 자란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새싹들을 보고있으면 순간적으로 마음에 근심과 불안이 걷히고 단순한 설렘과 환희가 들어찬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농사의 즐거움이다.

상추입니다.
바질이고요.

기후위기 대응의 실패와 잇따른 침략 전쟁, 인공지능기술의 급격한 발달까지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어지럽고 불안한 나날이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텃밭 농사를 잘 일궈 보아야겠다. 눈 뜨자마자 SNS 피드보다 자라나는 식물이 궁금해진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하지만 건강한 변화 같으니, 앞으로의 일들은 모두 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전 06화인구소멸의 시대에 아이와 함께 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