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30
2019년 3월 6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글을 안 쓴 지 아니, 못 쓴 지 한 달이 되었다.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머리가 바빴고, 한국에서 시부모님과 동생 가족이 번갈아 가며 우리 집을 방문한 탓에 몸이 바빴고, 애 둘이 차례로 아픈 탓에 마음이 바빴다. 빛의 속도로 일상이 휘몰아치던 어느 출근길, 빼곡히 정열된 사람 머리통만 보이는 지하철 안을 두리번거리다 새삼 바빠서 글을 못 쓴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고, 내 생각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고, 일상을 지나치게 꽉꽉 채워 살아내느라 글 한자를 못 썼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이 많을 때, 해야 하는 일들의 대부분이 내 손을 거쳐야 안심이 될 때, 해야 하는 일을 잘 해야 하는데 능력치가 따라가지 않을 때, 숨 쉴 구멍을 찾는 일은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릴없이 그런 시간을 보내며 출퇴근 지하철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다. 쉴 새 없이 달리고 움직이긴 하는데 우왕좌왕하는 모습이다. 정확하고 적확한 목적과 방향도 모르고 열심히만 내달려서는 세상이 인정하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처세서를 무시하며, 난 그냥 막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달리는 사람이 무식하고 무지해 보일 수 있지만 세상이 말하는 승자와 정답만 다 옳은 것은 아니니까, 내가 만드는 ‘일등’과 ‘정답지’도 세상에 존재해야 내가 숨 쉬고 살 수 있으니까, 그래도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제멋대로 가열차게 달리면서 제일 좋아하는 책을 읽지 못하고, 글을 쓰지 못하는 일상이 답답하고 막막하다는 생각이 헛트름처럼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글을 못 쓰고 있다는 걸 자책하면서 열심히만 살아도 괜찮다고 나를 토닥이던 그 순간, 예전 직장 사수에게 메시지가 왔다. 왜 요즘 글 안 쓰냐고. 다들 기다렸다는 듯 지인 몇 명이 연달아 물어오기 시작했다. 왜 요즘 글이 안 올라오냐고. 세상에나. 내가 끼적인 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니. 내 하찮은 일상과 방향도 목적도 없이 흘러가는 생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니. 어디를 향해 절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한 아침이었다.
3월 첫 주에는 세상이 무너져도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며 어떤 이야기를 쓸까 고민했다. 사람들은 왜 내 글을 기다렸을까(수백수천 명이 내 글을 기다린 것은 아니고 몇 분이 기다려 주셨다. 그분들 모두 올 한 해 큰 복 받으시길!), 나는 그간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어디로 가기를 희망하며 살고 있었을까, 그리하여 어디쯤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또다시 바람 가는 대로 물 흐르는 대로 이리저리 부딪히며 흘러가는 생각을 따라 걸어가 본다. 갑자기 머릿속이 찌릿해진다. 눈을 감고 해를 바라보면 눈두덩에 남아 너울거리는 잔영 같은 붉은빛 한줄기가 머릿속에 퍼지는 느낌이 든다.
‘나’와 ‘내’가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었구나. 몸을 한껏 웅크리고 나뭇가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창공을 날아오를 그날만 기다리는 누에고치처럼 마냥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정신없이 사는 동안 수만 가지 생각들이 흐르고 뛰쳐나올 기회를 얻지 못해 얽히고설킨 생각들이 곤죽이 되어 버렸구나. 생각의 실타래 하나를 죽 빼내는 순간, 두어 개의 생각은 저절로 풀려버렸고, 그 옆에 얽힌 채로 굴러다니는 실타래가 자기도 좀 풀어달라고 징징거리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는 동안 머릿속은 바빠졌다. 그동안 눈으로 봤던 사람, 나무, 구름, 귀로 들었던 사람들 말소리, 바람소리, 노랫소리, 손끝에 와닿았던 살결, 흙과 열매들이 떠오르고 사라지고 머무르고 손에 잡힐 듯 눈앞에 펼쳐졌다.
글을 쓰겠다 마음을 먹고,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생각하려 애썼을 뿐인데 뇌에 초록 등이 켜지면서 온몸과 마음이 강렬하게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나에게 글쓰기란 숨구멍이었구나
뱉어낼 이야기를 찾아가는 여정에 들어서자마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수천 번 수만 번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달릴 수 있다는 생각했다. 호주에 가서 번지점프를 하더라도, 독일 아우토반을 200km 넘는 속도로 달리더라도, 깊고 깊은 태평양에 빨려 들어가듯 스킨 스쿠버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머리와 마음과 몸이 한꺼번에 짜릿해질 수 있을까 싶었다. 한두 개 정도의 나만의 ‘숨구멍’을 찾아내어 간직하고 산다는 건 그 자체로 복된 삶이 아닐까. 누가 굳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누가 애써 칭찬해주지 않아도 자신의 ‘숨구멍’이 무엇인지 알고 즐기는 것은 나 자신을 애정하고, 돌봐주고, 다독여준다는 말과 같은 말처럼 느껴졌다.
살아가는 내내 우리는 자신의 ‘숨구멍’을 찾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숨구멍은 취미생활이나 스트레스 해소와 같은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한 발짝 더 깊게 들어가 ‘나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이라 말하고 싶다. 나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를 오롯이 들여다보고, 생긴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축 처진 어깨를 한번 보듬어줄 수 있는 능력을 내 안에서 가져오는 시간이 ‘숨구멍’이라 믿는다. 인간이 좀 간사해서 일상이 잘 굴러갈 때에는 숨구멍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마음이 평안하지 않고, 하던 일이 지지부진하고, 몸이 마음을 따라가주지 않아 짜증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왜 이렇게 살지’, ‘난 왜 이 모양이지’, ‘노력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마음이 장마에 강물 차오르듯 차오른다. 그럴 때 숨겨놓은 ‘숨구멍’있다면 상황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숨구멍으로 작고 가느다란 숨 한번 내쉬고, 작지만 따뜻한 기운 들이쉬면서 삶의 속도를 조절하다 보면 그 숨구멍 덕분에 살(아나 갈) 구멍도 보인다.
숨구멍이 없으면 살구멍도 없다는 마음으로 숨구멍을 돌본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하루 2시간 되는 시간을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읽을지 생각하는 것부터 내 숨구멍을 보살피는 시간은 시작된다. 우연히 알게 되어 귓구멍을 파고들어 심장에 닿는 노래나 음악이 있다면 수백 번, 수천 번 듣는다. 가사를 찾아 읽어보고 영어 노래는 번역도 해보고 따라 불러보기도 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골라 빠르게 읽어내려가다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만드는 문구를 발견하면 잠깐 책장을 덮고 생각에 빠진다. 그 페이지를 사진에 담고 생각을 정리해 글로 남기기도 하고, 좋아하는 이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좋아하는 음악과 글을 만나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에 끝이 보이지 않을 때면 지하철이 싱가포르 지하를 뚫고 올라가 옆 동네 말레이시아를 횡단할 정도로 하염없이 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애써 숨구멍을 관리하다가 숨구멍 관리마저 힘에 부칠 때면 잠깐 모든 행위와 의도를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겨울잠을 청하는 곰처럼 옹송거리고 앉아 힘을 모은다. 이것도 숨구멍 관리의 또 다른 방법이다. 음식을 먹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좋은 음악과 책을 즐기며 외부에서 얻는 에너지도 있지만 내 몸속, 가장 깊은 곳에서 내 힘으로만 끌어올려야 하는 에너지도 있다. 내 몸 안팎에서 잘 얻고 내려놓을 줄 알아야 살구멍을 위한 숨구멍도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글을 쓰지 않은 한 달 동안 내 마음을 울게 만든, 내 눈을 번쩍 뜨게 만든 음악 하나가 나와야 한다.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살펴보니 꽤 다양한 종류의 음악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신곡도 있고, 이십 년 전에 발매된 장국영 앨범도 있다.(장국영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남자 배우이다.) 영화 아멜리에의 OST도 찾아 들었고 오랜만에 샹송도 꽤 들었다. 그중 감동받은 음악은 바로 이거다.
어느 날 퇴근길 우연히 이 음악을 듣게 되었다. 걸어가다 잠깐 가던 길을 멈춰 서서는 음악에 집중했다. 음악을 듣고 있는 내내 내 눈앞에 펼쳐진 건 푸르디푸른 들판이었다. 저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이 내 치맛단을 잡아끌고 손등을 간지럽혔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듯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하늘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을 마음으로 따라갔다. 음악이 끝나지 않았다면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 같다. 한 곡이 끝이 나고 다음 곡이 시작되어서야 지하철역을 향해 다시 걸었다. 조금 그리웠다. 아니, 음악을 듣다 보니 내 마음에서 그리움이 묻어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그리움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싶어 마음을 더듬어갔다. 가장 오래 사회생활을 했던 회사가 사무실을 옮긴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올 때였다. 밤을 지새우며 울고 웃으며 일했던 곳, 후배들과 어깨동무하고 커피 한잔하러 나서던 곳, 청춘도 사랑도 열정도 모두 불나방처럼 불태우던 곳이 사라진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그곳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마음 때문이었을까, 음악을 듣는 내내 손에 잡히지 않는 뭔가가 그리웠다. 음악의 제목을 보니 독어다. 독일어 사전으로 검색해본다.
Schnsucht, 그리움, 동경
단어의 뜻을 보고 나니 작곡가를 길에서 마주친 듯했다. 어쩌면 누가 내 마음을 읽고 이 음악을 만나게 해준 건 아닌가 싶었다. 며칠 동안 이 음악을 들으며 추억 한 귀퉁이를 접었다. 사람도 공간도 모두 한때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도, 무한한 것도 없다. 내가 사는 시간을 우주와 비교하면 또 얼마나 찰나일까.
* 그레그 하인즈의 Schnsucht(외로움)을 유튜브에서 찾을 수 없어 대신 the spin을 들어본다.
중요한 회사 일 하나가 마무리되었고, 당분간 우리 집을 찾아올 식구들도 없고, 아이들은 모두 컨디션을 회복했고, 일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짝꿍도 서서히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당분간 내 숨구멍인 글 쓰고 글 읽는 일에 매진하면서 신나게 울고 웃으며 지내야겠다. 누군가의 숨구멍도 내 것처럼 제 역할을 잘 하고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