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드보르작 피아노5중주2번

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31

by 아멜리 Amelie
Dvořák - Piano Quintet No. 2 - Leschenko / Jansen / Brovtsyn / Rachlin / Maisky (Utrecht, 2007)


2019년 3월 13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2017년 6월, 양평에서 주말농장 밭을 갈고 온 후여서인지 어깨가 욱신 거리던 초여름 어느 날, 짝꿍이 말은 건넨다.


“싱가포르에 내가 하는 일이랑 똑같은 자리가 있어. 지원해볼까?”

“응, 지원해.”


며칠 후, 짝꿍은 지원서를 보내고 약간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다시 물어본다.


“왜 싱가포르 자리에 지원하자고 했어?”

“지금이랑 다르게 살아볼 수 있잖아. 그게 좋아.”

“결정이 왜 이렇게 쉬워? 고민해봐야 하지 않아?”

“고민해서 답이 나오나, 가봐야 알지. 가보자. 가서 어떤지 보자.”


둘째 아이는 태어나 일주일 만에 여권을 얻었고, 우린 한국을 떠날 날짜를 정해야 했다. 먼저 싱가포르에 가서 일을 하고 있던, 생각이 많은 짝꿍은 날짜를 정하느라 혼자 애를 먹고 있었다. 짝꿍은 나에게 또 물어본다.


“언제 오고 싶어?”

“3월 12일.”

“왜, 3월 12일이야?”

“그냥, 내 생일에 가고 싶어. 내가 태어난 날.”


2018년 3월 12일 우리는 한국을 떠나 싱가포르로 왔다. ‘한번 가보자’는 말 한마디는 온갖 종류의 근심 걱정과 두려움을 모두 떨쳐내기에 충분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갓난아이를 껴안고 큰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비행기에 오르는 내 마음엔 떨림과 기대감과 궁금함만 꽉꽉 채웠다.


그리하여 나는 어제 태어난 지 서른여덟 해를 살았고, 싱가포르에서 꼭 일 년을 살아낸 날을 맞이했다. 왜 내가 태어난 날 이곳에 오고 싶었을까? 항공권이 저렴한 날도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올 수도 있고, 친정집에 얹혀살며 둘째 아이를 좀 더 키우고 올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생일날 이곳에 왔을까.


누군가에게 선택된 내 생일을 ‘나의 선택’이라는 포장지로 곱게 꾸며주고 싶었다. 부모님의 사랑과 애정으로 잉태되어 뱃속에서 자라 세상에 나온 날이 늘 기분 좋은 날로 기억하는 생일이긴 하나 그 과정에 내 의지와 선택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성별도, 국적도, 출생일도, 희망하는 키와 몸무게도, 생김새도 어느 것 하나 내가 결정한 건 없다. 모두 결정되어 있었거나 계획되어 있었다. 싱가포르라는 나라를 내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을 오거나 오지 않을 선택은 내가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살아갈 나라를 선택한다니, 이것만큼 매력적인 선택이 또 있을까 싶어 마치 국적을 새로 얻는 마음으로 ‘Let’s GO’를 외치며 이곳으로 날아왔다.


싱가포르로 가겠다는 선택, 이곳에서 오래 머무르겠다는 선택, 일을 다시 하겠다는 선택, 계속해서 새로운 일을 벌여나가겠다는 선택을 하면서 매번 즐겁고, 새롭기만 했을까. 아니다. 후회하기도 했고, 아쉬움과 미련이 밀려들기도 했다. 이 복잡다단한 감정들 속에서 그럼 왜 새로운 선택을 갈망했나 돌아보니 딱 하나의 마음이 부릅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 살고 가는 인생, 뒹구르고 솟아오르고 나자빠지며 신명 나게 살아보자



삶은 유한하고 우리가 계획한 것과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은 일찌감치 배웠다. IMF 외환위기로 서울로 대학을 가는 꿈을 접어야 했을 때, 동생의 사고로 온 식구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전후 복구하듯 다시 일상의 담벼락을 쌓아 올려야 했을 때, 아이를 낳아 키우며 찬란한 이십 대의 일상과 작별해야 했을 때, 계획 따위가 인생에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부터 삼십 대의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계획을 세우고 가능성을 타진하고 주변에 조언을 구하며 내일을 예측하려 애쓰던 시간을 줄이고 또 줄였다. 짧은 생각과 결정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실행에 쏟아부었다. 한번 해보고 생각해보고, 두 번 해보고 다시 생각했다. 안될만한 일은 두어 번 해보고 접었고, 괜찮은 도전은 지겨울 때까지 계속했다. 삶은 언제나 유한하고 우리의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테니까.


선택을 하는 행위는 나에게 중요하다.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면서 삶의 퍼즐을 맞춰가는 재미가 있어서다. 100개가 넘는 조각으로 구성된 퍼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몇 번 퍼즐을 해본 경험이 있어서 퍼즐 판의 가장자리부터 그림을 맞춰나간다. 그러고 나서 중앙에 위치한 색깔이 독특하거나 패턴이 있어 조각처럼 조금 쉬운 부분을 채운다. 이까지 성공하면 지금부터는 아리송의 연속이다. 색깔이며 모양이 죄다 비슷하고 끼워 넣는 퍼즐마다 2프로 부족해 맞지 않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이 조각 저 조각 맞춰 보고 안되면 다른 조각으로 바꾸면 된다. 사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의심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결정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주제도 있고, 선택을 번복해야 하거나 다시 선택해야 하거나 시간 낭비라 느끼는 선택도 있을 수 있다. 고작 퍼즐게임도 태어나 처음으로 맞춰보는 이에겐 어마어마한 도전일 텐데 살아내는 건 더한 일일 거다.


빠른 선택을 한다는 것이 아무거나 즉흥적으로 고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 따지기도 하고,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도 한다. 어떤 선택이 좋은 선택일까. 현재를 기준으로 나의 의지와 열정을 담고 나와 연결된 사람들(가족 또는 동료)도 같이 즐거워할 수 있는 선택이 지금 나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다. 나에겐 120km로 달릴 수 있는 에너지가 가득이지만 아직 20km로 달려야만 하는 아이들이 곁에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그럴 땐 20km로 달리면서 주변 풍경을 모두 만끽하는 자전거와 같은 선택지를 택하면 된다. 현실과는 타협을 하겠지만 내가 추구하는 즐거움만은 오롯이 담은 정답지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선택을 하다 보면 현실의 한계나 제약적인 부분조차도 즐길 수 있게 된다. 한계와 극복 지점을 불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고, 예상하지 않은 즐거움으로 가득 찬 일상을 만날 수도 있다. 마치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가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가지고 사는 마음이라고나 할까.


IMG_4115.JPG?type=w1 퇴근길에 짝꿍과 아이들을 만나 마주 앉아 밥 한끼를 먹고 가족 사진을 찍었다. 타지에서 일년동안 우리 모두 고생이 참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일날 같이 들으면 좋겠다고 음악 하나를 추천해줬다. 드보르작 피아노 5중주 2번. 하루 온종일 이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는 내내 한가지 상상만 했다. 내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삐죽 솟아나 하늘로 두둥실 날아올라, 나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따뜻한 커피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수많은 선택을 하고 살지만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선택이라 머리 한구석 과거 회상만 전담으로 하는 녀석들을 불러내어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것 역시 유한한 삶을 대하는 나의 선택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 사는 게 꼭 반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공을 하늘로 던지는 놀이 같다. 일정한 크기의 반원을 그리며 땅에 떨어지는 공을 던지는 것 같지만 가끔 공은 발 앞에 툭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또 어떨 땐 생각지 않은 큰 반원을 그리며 멀리까지 날아가기도 한다. 공을 던질 때 불어오는 바람과 주변에 빼앗기는 내 시선처럼 삶의 안팎에 존재하는 수만 가지 변수들은 우리의 능숙함을 침범하고 들어온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을 던진다는 행위’ 아닐까. 공을 던질 수만 있다면 계속 던지며 살겠다. 선택하고 후회하고 즐거워하며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한 길을 걷는 재미로 삶을 채우고 싶다.


서른여덟 생일을 맞이하며, 삶에 대한 애정과 의지를 밥공기 한가득 꾹꾹 눌러 담는다. 그 증거(?)로 점심시간에 운동을 하겠다며 피트니스 센터 등록을 감행했다. 4개월 후 과연 나는, 복근을 장착하게 될까 아니면 피트니스 센터 등록은 잠깐 쉬어도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될까. 이 선택의 결과는 4개월 후에 다시 들여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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