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35
한국에 추석이 찾아왔다. 시간이 흐르면 으레 찾아오는 명절이라고 하지만 땅과 물과 사람이 낯선 이곳에서 추석을 느낄 방법이 좀처럼 없다. 서울 사는 동생이 대구로 향한다며 귀향 소식을 전해왔다. 동생과 둘이 서울에서 자취할 때 명절 준비의 첫 번째는 바로 대구 가는 기차표를 미리 끊어두는 것이었다. 얇은 지갑 사정에 양손 가득 무언가를 무겁게 들고 내려가는 귀향은 아니었지만 우리를 버선발로 뛰어나와 반기는 이들이 있어 따뜻한 시간이었다. 그리웠던 이들 얼굴 한 번 더 보고, 익숙한 냄새 풍기는 음식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만으로 위안과 응원을 얻었다. 그리운 이들 곁에서 보듬지 못하고 멀리서 영상 통화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지금이 조금은 어색하고 허전하다.
얼마 전 뜻하지 않은 이별을 했다. 당황스럽다가 화도 났다가 애잔하기도 한 이별이었다. 싱가포르에서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이면 다들 입주 도우미를 고용한다. 이들은 대게 싱가포르 인근 국가인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등지에서 일하러 오는 여성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올해 1월에 취직을 하면서 나도 입주 도우미를 고용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차를 타고 10시간은 가야 나오는 어느 작은 동네에서 온 그녀는 나보다 키가 훨씬 작았고, 피부는 조금 더 까맣고 짙은 눈동자를 가졌다. 나에게 맴(‘maam’)이란 경어를 쓰던 그녀는 아이들의 밥을 챙기고, 목욕을 시키고, 부모가 없는 한낮에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었다.
어느 날 그녀는 연로하신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나도 그녀와 같은 외국인 노동자이기에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를 보러 갈 수 있도록 해보자고 했다. 때마침 8월 초에 한국에서 식구들이 싱가포르로 놀러를 오기에 그때 다녀오라며 그녀와 일정을 조정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필리핀을 다녀오는 비자를 받았고,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이곳을 잠시 떠나는 날만 기다렸다. 언젠가 저녁 시간에 다시 아들을 만나게 되어 기쁘냐고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녀는 아이가 4살 때 필리핀을 떠났고, 5년이 넘도록 고향에 가지 못했고, 그동안 아이는 어느새 9살이 되어 있었다.) 아이를 만나는 건 너무나도 기쁘지만 아이가 너무 오랜만에 만나러 온 엄마를 마음에서 밀어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녀가 필리핀으로 떠나는 날 가방을 싸는 모습을 지켜봤다. 식구들을 주려고 산 물건들인지 포장된 물건들이 잔뜩 들어있었고, 아이에게 선물로 주라고 새로 산 책가방 하나를 건넸다. 자정에 뜨는 비행기를 타러 가는 그녀는 들떠있었고, 너무 즐거워 감추지 못하는 웃음이 터져 나와 입가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마닐라에 도착해 고향으로 떠나는 버스를 탔다며 고맙다는 메시지를 받은 후 2주 동안 그녀에게서 날아오는 메시지는 없었다. 의아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5년 만에 아들을 만나고 가족들을 만나 즐겁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굳이 고용주인 나에게 미주알고주알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싶었다. 그녀가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는 아침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냐고 메시지를 보냈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행기가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착륙하는 밤 12시가 되어 싱가포르에 잘 도착했냐고 메시지를 보냈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내가 보낸 메시지를 단 하나도 읽지 않았고, 전화는 꺼져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돌보던 아이가 있는 우리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도착하지 않은 건가 싶어 새벽까지 그녀를 기다렸다. 혹시나 비행기가 연착될 수도 있고,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창이공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그녀가 타고 와야 했던 비행기는 싱가포르 땅에 잘 내려앉았다. 그녀만 그 비행기에 몸을 싣지 않은 게 분명해 보였다. 왜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는지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자식을 키우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고향에 주저앉았냐고 그녀를 어리석게 여겼다. (필리핀의 임금 수준은 낮은 편이라 싱가포르나 중동에서 입주 도우미로 일하며 받는 급여는 상당 수준이라 알고 있다.) 서너 살 때 할머니 손에 떼 놓고 온 아이가 다 큰 걸 보고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는 엄마가 있겠냐며 그녀를 두둔했다. 적어도 자기 손으로 돌보던 아이들이 눈에 밟힐 수도 있으니 나에게 못 간다는 메시지 하나는 예의상 보내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그녀를 힐난했다.(그녀는 필리핀으로 향하던 그날, 우리 둘째 아이가 보고 싶을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몇 달 돌보던 남의 자식이 보고 싶으면 얼마나 보고 싶겠냐고 자기 자식이 엄마도 없이 몇 년을 살았는데 그렇게 주저앉을 수도 있겠다며 내 마음을 내가 스스로 설득하기도 했다. 수도 없는 경우의 수를 혼자 상상하며 밤을 보내는데 아이를 맡길 곳 없는 나의 상황도 갑갑했지만 그렇게 떠나서 돌아오지 않기로 결심한 그녀의 상황도 참으로 갑갑해 보였다.
생각은 돌고 돌아 그녀가 필리핀으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싸던 날로 날아갔다. 생각해보니 그녀의 짐가방은 조금 희한했다. 새로 산 옷들은 잔뜩 여행 가방에 싸고, 오래되고 낡은 옷은 모두 우리 집에 보관했다. 식구들에게 나눠주려나 보다 생각도 했지만 왠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날이었다. 그녀가 필리핀에 있는 동안 남편과 가끔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야기를 종종 나눴다. 몇 년 만에 혼자 있는 아이를 다시 보고 나서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오는 게 얼마나 힘들까, 돈이 뭐라고 자식까지 남겨두고 멀리까지 와서 꼭 돈을 벌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나눴다. 국가가 가진 경쟁력이 한 인간의 인생과 운명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크다는 이야기까지 나누며 물증은 없지만 심증으로 그녀의 복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이사를 하며 집안 정리를 하는데 그녀와 우리 아이들이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내가 회사에서 프로젝트로 행사장 이벤트를 진행했었는데 남편이 아이들과 그녀와 함께 이벤트장에 방문했던 날이었다. 그녀는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나에게 물어봤고, 난 흔쾌히 찍어도 된다고 했다. 이벤트장에서 건네받은 사진은 총 2장이었는데 하나는 그녀가 가져가고 하나는 우리 집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녀가 필리핀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에 우리 아이들과 찍은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생각했다. 이렇게 아이들과 사진을 찍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남기는 사진이 될 거라는 걸 그녀는 알았을까. 나중에 혹시나 우리 아이들이 생각날 때 보려고 사진을 챙겨 갔을까.
그녀는 아픔이 많았고, 그걸 듣고 있다 보면 내 마음이 버거워지기도 했고,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들어주고 싶었다. 외국에 나와보니 마음을 편하게 나눌 친구 만나는 것도 어렵고, 아이들과 남편과 같이 살아도 외로워지는 게 외국 생활인데 그녀에게 지금 이 생활은 오죽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남의 살림을 만지고,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눈치를 보고 있을까 싶어 안 보고 못 본 척을 하기도 했다. 남의 자식 엉덩이를 씻겨 주고 있으면 내 자식 엉덩이는 누가 이렇게 깨끗하게 씻겨 주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왜 안 들겠는가, 남의 자식 입에 들어가는 밥알을 보고 있으면 내 자식은 따뜻한 밥 한 그릇 잘 챙겨 먹고 다닐까 하는 생각이 왜 안 들겠는가, 남의 자식 학교 보내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내 자식은 이렇게 학교 잘 다니면서 많이 배우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왜 안 들겠는가. 이렇게 사는 게 그녀의 직업이라고 하지만 그녀에게 귀하고 소중한 것들에 손길 하나 미치지 못하는 그녀 인생이 가엽고 안쓰러웠다.
브람스의 인터메조를 찾아 듣다 싱가포르에 오기 전 수시로 드나들던 양평을 떠올렸다. 싱가포르에 오기 전 2년 정도 토요일 아침에 눈만 뜨면 양평으로 향했다. 두물머리도 걷고, 중미산도 오르고, 동네 초등학교에서 한참 동안 놀다 오기도 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시간이면 산등성이와 하늘의 경계가 진하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 하늘색은 마음에 담아두고픈 고운 색이라 여겼다. 내가 좋아한 양평 잣나무 숲도, 북한강변 문호리도, 길가에 웅크리고 있던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도, 손끝에 잠깐 머무르고 떠나던 강바람도, 계절마다 각기 다른 그림을 그려내던 하늘도 모두 아득하니 그리워진다. 두고 온 산천도 이렇게 그리운데 두고 온 피붙이는 오죽 그리울까 하며 나에게 닿고 떠는 그녀를 떠올려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생을 살아오며 많은 이들과 마음을 겹치기도 하고, 떠나보내기도 한다. 사나흘 정도 아침부터 밤까지 같이 일을 하며 정을 나눈 촬영팀이 한국으로 돌아갈 때에도 크나큰 섭섭함을 느꼈고,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가까이서 마음을 나눈 동네 친구가 홍콩으로 이사 갈 때 눈물로 답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 헤어짐에 익숙해지고 덤덤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이별은 단어 그 자체만으로도 슬픔이 된다. 내 몸과 마음에 닿고 떠나는 모든 이들이 안녕하기를 바라는 9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