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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 Amelie Sep 16. 2021

영어를 배우는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봅니다

그로잉맘 열네 번째이야기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한국에서 12년 동안 일을 하면서 영어로 업무를 진행한 경험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목표나 방향 없이 영어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에 간간이 수업도 듣고 원서를 읽으려 애썼지만 나의 노력은 태평양에 잉크 몇 방울 뿌리는 정도라고 해야 할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에 비하면 지금의 나의 영어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해외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수준이지만 말이다. 싱가포르에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동료들이 많이 도와줘서 잘 버틸 수 있었다. 최근 한국인 동료가 퇴사를 하면서 땀이 삐질 흐르는 상황이 몇 번 있긴 했지만 그동안 알게 모르게 영어 실력이 향상되었는지 아직은 견딜 만하다.


나는 2018년 2월 싱가포르에 왔다. 고백건대 영어로 된 도로 표지판과 안내판이 눈에 익숙해지는 데까지 일 년이 걸렸다. 우측통행을 하라는 말도, 지하철 역 근처를 배회하지 말라는 말도, 지하철과 플랫폼 사이가 조금 멀어 지하철을 내릴 때 조심하라는 말도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다 아는 내용이고 어렵지 않은 영어 단어들인데도 내 눈과 뇌는 영어라는 문자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싱가포르 현지 정세는 파악하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에 슈퍼에서 장을 볼 때면 신문 한 부를 샀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고 고요한 시간이 오면 커피를 한 잔 끓이고 그 신문을 펼치곤 했다. 씹지도 않고 국수를 후루루 삼키는 사람처럼 기사 제목 몇 개 읽다 보면 현기증이 나서 신문을 덮었다. 낮잠 자고 일어나 말쑥한 얼굴을 한 아이들은 내가 내팽개친 그 신문을 찢으며 놀았다. 내가 아침부터 밤까지 줄곧 사용하는 모국어와 다르다고 하나 학교 다니는 내내 봐온 게 영어인데 이렇게까지 힘들까 싶었다. 신문 편집도 내 눈에 익숙하지 않았고, 한국에서 흔히 보는 광고와는 다른 결의 광고 일색이었고, 특히나 읽을 수는 있으나 이해되지 않는 언어를 바라보는 일은 두통약이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 편두통 같은 존재였다. 


여기서 4년을 살면서 가장 큰 변화라고 느끼는 것은 영어에 익숙해졌다는 것. 이제는 표지판도 잘 읽고 안내문도 한눈에 쏙 들어온다. 신문을 펼치고 제목과 첫 문단을 읽을 때, 글쓴이가 찾은 사실과 그의 주장을 머리로 모두 이해하고 마음으로 공감하진 못하지만 활자를 눈으로 좇으며 이해하려 애쓸 때 두통이 생길 정도는 아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가 나의 시신경을 지나 뇌의 어느 영역에 정보를 접수시키고 내용을 인지하는 경로가 편안해지기까지 4년이 걸린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거실 구석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작고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연필을 쥐고 글자를 쓰고, 가느다란 실에 구슬을 꿰고, 자동차를 가지고 놀며 이야기를 꾸며내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 세상이 편안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고, 어색한 자체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쿵 하고 떨어졌다. 


새롭고 모르는 것 투성이의 세상을 탐험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박진감 넘칠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단할까 싶다. 어른들도 처음 가는 길을 걸을 때에 온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걷느라 집에 돌아오면 털썩 쓰러지는데 아이들의 하루는 오죽할까. 즐겁기만 하면 다행이지만 아이들도 마음을 다치는 날이 있고,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날이 있고, 잘 몰라서 했던 실수들에 저도 모르게 자신을 다그치는 날도 있을 테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애쓰다 눈물이 터져 오르는 날도 있을 테니까. 


온몸의 신경과 온 마음이 탐색하느라 분주했던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다. 아이의 머리칼을 정돈해주고 등허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며 차분하고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오늘 하루도 온 세상을 탐색하느라 애쓰느라,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너의 마음을 다독이려 애쓰느라 고생이 많았어. 두 귀 쫑긋 세우고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눈앞에 펼쳐진 세상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배우려 애쓰느라 얼마나 고단했을까. 우리 꿈나라에 가서는 긴장하지 않아도 즐겁기만 한 세상에서 밤새 놀다 오자. 오늘도 애썼다. 우리 아가.”


우리는 모두 반복되지 않고 매일 새롭게 펼쳐지는 시간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애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 같아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시간을 잘도 버텨내며 말이다. 엄마도 아빠도 아이도,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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