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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 Amelie Nov 11. 2021

큰 딸, 맏이 말고 그냥 너

그로잉맘 열여덟 번째 이야기

지난 몇 주는 악몽 같았다. 꿈에서 깼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꿈 속이고, 깼다고 생각했는데 또 꿈 속인 꿈을 꾸듯 일을 했다. 일에 끝이 없어 새벽부터 밤늦도록 망부석처럼 앉아 일만 한 날도 많았다. 심지어 큰 아이는 방학이었고 둘째는 누나가 집에 있으니 덩달아 유치원을 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때였다. 힘겨운 날들을 버티다 금요일 밤이 오면 내 마음이 먼저 주말을 눈치챘고, 하늘로 휘휘 날아가는 풍선처럼 가벼워졌다. 


토요일 아침, 일찌감치 일어난 아이들은 내 방을 친히 방문해 나의 단잠을 깨웠다. 바쁜 사이 조금 더 자란 아이들의 어깨와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비비며 주중에 못다 한 애정 표현을 찐하게 했다. 최근 큰아이와 케이크를 몇 번 구우며 커다란 유리볼이 필요해 베이킹 도구를 사러 나섰다. 매장을 구경하고 크기가 적당한 유리볼을 구입하고 나오는데 봇물 터지듯 메시지가 ‘띵똥’ 거리기 시작했다. 쇼핑몰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핸드폰을 내려보며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는데 저 멀리 아이들과 남편이 보였다. 성큼성큼 남편을 향해 다가가 말했다.


“나 집에 가서 일해야 해. 애들이랑 뭐라도 하고 놀다가 집에 와. 저녁에 만나.”


부리나케 집에 와서 의자와 한 몸이 되어 노트북에 머리를 박고 오후 반나절을 보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자 재밌게 잘 놀았다는 징표로 웃음기를 얼굴에 가득 담은 아이들이 집에 왔다. 엄청 지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남편의 모습도 예상외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잠들기 전 남편이 말했다.


“하은이는 밖에 나가면 엄청 의젓해. 특히 네가 없을 때에는 태오한테 자기가 먼저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태오 먹는 거 노는 거 챙겨주고, 내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해. 완전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야. 이제 많이 컸나 봐.”


남편의 말을 듣고 나는 금세 슬퍼졌다. 아이가 자라서 의젓해졌다는 안심보다는 아이가 맏이 역할을 시작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어릴 적 내 마음이 떠올랐다.


나는 2녀 1남 중 장녀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언제나 아끼고 나눠야 했다. 가장 먼저 나누는 사람은 나여야만 했고, 언니이고 누나니까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비단 부모님뿐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 모두 나에게 장녀의 역할을 알려줬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 때에도 미끄럼틀 위를 혼자 기어올라가는 막내 동생을 돌봐야 했고, 동생의 방학 숙제를 챙겨줬다. 으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랐다. 그게 맏이이자 맏딸인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어 엄마에게 어릴 적에는 큰 딸인 게 싫을 때도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때 엄마는 뭘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행동을 했냐고 되물으셨다.

 

“꼭 뭔가 하라고 꼭 집어 말해서 하나요, 세상이 그렇게 생겼으니 거기 맞춰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하죠.”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옛말도 싫고, 맏이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동생들에게 양보하고 동생들을 돌보는 엄마 노릇을 하는 것도 별로다. 원하거나 선택해서 다른 형제자매들 보다 먼저 태어난 것이 아니니 순서에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다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서로를 대하면 된다. 큰 아이든 작은 아이든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나눠주고 같이 할 수 있다. 그 상대가 형제자매일 수 있다. 그리고 큰 아이도 아이일 뿐 엄마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주에 큰 프로젝트 하나를 마무리 짓고 아이들과 셋이서 서점에 갔다. 남편이 해준 말도 있고 해서 아빠가 없는 상황에서 큰아이가 어떤 의젓한 행동을 하는지 나도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가 된 것일까. 아이는 내가 익히 집에서 봐온 아이의 모습으로 하루 온종일 나에게 칭얼거리고 치근덕거리고 동생과 말도 안 되는 장난을 치면서 하루 온종일 서점과 식당을 쏘다녔다. 


그래, 장녀, 맏이일 필요 없어. 그냥 너로 살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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