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6개월 연애를 했고, 결혼한 지 어느덧 9년이 되어 간다. 이제 남편은 과거에 사귀거나 좋아한 남자들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유일한 남자가 되었다. 함께한 시간이 감정의 정도와 깊이를 모두 이야기해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이따금 있다. 체중이든 관계이든 성적이든 '유지'하는 것이 가장 지난한 일이니까.
요즘 남편은 남자 친구처럼 느껴진다. 결혼하기 전, 연애할 때, 아니 그 보다 처음 만난 그 순간의 남자처럼 보인다. 남편은 책임과 의무감과 같은 말 같고, 남자 친구는 마음과 감정에 더 가까이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하는 일상은 예전과 같은데 남편을 향한 내 마음은 아주 많이 달라졌다.
왜 갑자기 이 남자가 이렇게 애틋한 사람이 되었을까?
이건 모두 코비드로 인해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재택 덕분이다.
지난 2년간 남편과 나란히 앉아 일을 하고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 그 어떤 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각자 어떤 사람인지, 감정에 따라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기쁜지,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대화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지금 일과 월급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이직은 하고 싶은 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와 같은 주제는 가장 재미가 없었다.
어린 시절 어떤 성격의 아이였는 지,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거웠었는지, 자라면서 가장 영향을 준 사건, 사고는 무엇이었는지, 후회가 되는 시점이 있는지,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 지... 어린 시절 이야기를 참 많이 했다. 서로 각자의 공간에서 지냈던 이야기 속에는 부모님, 형재, 자매도 있었고, 서로 알고 있는 친구들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남편이 있었다.
이야기가 흐르다 우리가 맨 처음 만난 날, 우리의 연애 시절로 돌아간다. 어떻게 나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왜 처음에 주저했는지, 왜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는지 이야기가 돌고 돈다. 우리의 이야기이지만 남편이 하는 이야기는 남편의 것이었다. 그 속에 또다시 남편이 있었다.
남편의 옛 여자 친구를 연도별로 정리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 마음이 어떠했는지, 한 번의 연애가 끝나고 무엇을 느꼈었는지, 그리고 그 여자와는 어떤 영향을 주고받은 것 같은 지 그때로 돌아가 그 마음을 들어보기도 했다. 그 속에도 어김없이 남편이 있었다.
9년 가까이 혼인 관계를 유지하며 같이 살고 있는데 왜 대화 시간이 없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해야 하고 해치워야 하는 일들에 파묻힌 결혼 생활을 했다.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 아이를 어린이집에 던져 넣고 출근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다가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해대고 아이와 놀아주다 재우고 같이 잠든 날은 다시 일어나 쉰답시고 티브이를 보거나 게임을 한다. 찌뿌둥한 어깨는 한없이 찌뿌둥했고, 내일 있을 미팅과 발표 걱정에 잠을 청해도 편안하지 않은 밤들이 많았다. 그러다 주말이 오면 식구들 대소사를 챙기고 대형 쇼핑몰에 가서 장을 보고 주중에 못다 한 대청소를 하고 아이와 조금 더 찐하게 놀아줬다. 그때도 물론 시간이 날 때마다 대화는 했겠지만 대화는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 어딘가 닿지 못했고, 늘 부유하는 먼지처럼 존재하다 사라졌다.
이렇게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듣다가 이 남자가 점점 더 좋아졌다. 이태원 제일기획 앞에서 만난 날 느낀 감정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더 이 남자가 좋아졌다. 나는 남편과 둘이 나란히 걷는 시간도 좋고 마주하고 앉아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시간도 좋다. 젊고 이뻤던 그때 이태원 어느 술집에서 마시는 술보다 지금 남편과 마시는 술이 더 달고 맛있다. 그리고 그때 나눈 대화보다 지금 남편과 나누는 대화가 더 재밌고 유쾌하다.
아이들이 없이 둘이서만 잠깐 외출을 할 때 손도 잡고 싶고 장난도 치고 싶고 어디 멀리까지 가서 진짜 데이트도 하고 싶다. 강변이나 바닷가를 걷다가 허리를 껴안고 키스도 하고 싶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정신없이 웃고 싶기도 하다.
아직 십 년밖에 안되어서 이런 애틋한 마음에 빠질 수도 있을 테고, 마음을 돌아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어려운 일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도 식물처럼 물을 주고 해를 보게 해 주고 관심을 가져줘야 싹이 트고 자란다고 믿는다. 그냥 둔다고 저절로 무럭무럭 자라는 생명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아침에 나의 재택 동료가 그의 회사로 출근을 했다.
얼굴 보고 '너를 좋아해', '너를 사랑해' 라고 말을 건네는 건 쑥스러워 내 마음을 글로 남겼다.
사랑이 충만한 2022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