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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의 힘

방랑에 지친 영혼들

by 아멜리 Amelie

미국 땅 밟은 지 십사일이 지났다. 남편 회사 근처 레지던스에 짐 일부를 풀어놓고 지내는 이곳 생활은 단조롭다. 아침 6시에 일어나 7시에 조식을 먹으며 하루를 일찍 시작하지만 하루 종일 하는 일은 그리 거창하지 않다. 엊그제부터 운전을 조금씩 하면서 아이들과 인근 슈퍼에 가서 먹거리를 사 오거나, 5달러에 산 농구공을 가지고 공놀이를 하거나, 레지던스에 있는 세탁실에서 빨래를 돌리고,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고, 점심, 저녁을 숙소에서 해 먹고, 새벽 일찍, 밤늦게 일을 좀 한다.


싱가포르를 떠나기 직전에 동남아시아 시장을 타깃으로 콘텐츠를 배포하는 프로젝트 관련 마케팅 업무를 맡게 되어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일이 아니었다면 난 조각난 마음으로 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에게 일은 삼시 세 끼를 챙겨 먹듯 습관적으로 하던 거라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심정 안정에는 도움이 된다. 아이들은 5주째(한국을 다녀온 3주를 포함)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있고, 하루 2시간 이상 TV를 본다. 이른 아침 뉴스를 함께 시청할 때도 있지만 내가 일을 하거나 아이들도 뭘 할지 몰라 방황할 때면 만화를 틀어달라고 졸라대기 시작한다. 미국으로 오면서 유튜브 뮤직과 넷플릭스 구독을 모두 해지해서 숙소 거실의 TV가 아이들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내 귀를 미국 영어에 최대한 노출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하루 종일 TV가 켜져 있어도 죄책감이 덜할 수도 있겠지만 안정적인 일상 유지를 못하는 상황에서 TV 소리는 소음 그 자체이다.


이곳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렇게까지 방황에 지쳤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한국 여행 포함 5주째 집도 없이 사는 것은 생각보다 지치는 일이다. 한국에서 시댁과 친정을 오가며 지낼 때에도 힘들긴 했다. 한 방 가득 짐이 부려져 있고, 뭐 하나 찾으려면 가방 이곳저곳을 열어야 하는 생활을 계속하는 게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런 점에서는 레지던스에 사는 지금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내 로션 하나 둘 곳도 있고, 아이들 물건도 나름은 정리를 해서 보관할 수 있으니까.


아침에 커피를 한잔 마시며 왜 이렇게 마음이 쳐지는지 생각해봤다. 일단 이사 가고 싶은 집을 찾았고, 지원서(application)를 냈고, 엊그제 인터뷰(미국은 집주인과 인터뷰도 진행한다!)도 봤다. 집주인은 이번 주 내로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했고,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오늘부터 시작했고, 우린 특별히 할 일이 없고, 가고 싶은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대안을 찾고 싶지만 우리를 담당하는 에이전트는 추수감사절 휴가를 떠나서 없고, 대안 모색도 어렵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게 없는 상황이다.


어제부터 조금씩 운동을 해보려 애써봤지만, 글을 읽으려 책을 들고 다녀봤지만 마음과 머리가 모두 조각조각 나있는지 집중과 몰입이 안되었다. 집이 결정되면 아이 학교도 등록할 수가 있고, 우리도 계획이란 것을 세우고 하나씩 해나가는 맛이 살게 될 텐데,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고 계획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내 현재가 모두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겠고, 자꾸만 소셜미디어에 들어가서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이른 아침, 늦은 밤에 일을 하고, 아이들 문제집을 두어 장 같이 풀고, 세탁실을 다녀오고,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상이 없었다면 내 마음과 생각은 진짜 산산조각 났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일상을 유지하는 힘은 매일 지속적으로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5주 넘게 매일 하던 운동을 못하고 있는 것도 힘들고, 매일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던 시간도 확보하지 못해 내가 매일 하던 루틴이 깨져버려서 지금 생활에서 의욕을 못 찾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의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하루 5분이라도 온 마음으로 태양경배자세를 하고 싶지만, 소파에 푹 파묻혀 책을 탐닉하고 싶지만 아무것도 안된다. 아무것도 안 되는 것부터 받아들여야 마음이 조금 편해질 것 같다.


오전 2시간 동안 Pat Patrol을 시청한 아이들에게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다. 바다 옆에 커피숍이 있어서 플랫화이트를 한잔 마시고 싶지만 그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될 수도 있으니 기대를 하지 않아야지. 바다만 오래오래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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