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부터 코치 프로그램 수업을 2시간 듣고, 큰 아이와 숙소 식당에 가서 커피와 빵 한 조각, 사과 주스만 챙겨 와 물만두를 조리해 아이들 아침을 먹였다. 이제 아이들은 숙소 식당에서 주스 외에 그 어떤 것도 먹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도 한동안 오트밀을 잘 먹었는데 이제 먹기가 싫어졌고, 커피 한잔이 전부다.
아이들이 티브이로 Paw Patrtol 만화를 보는 사이 잠깐 일을 할 수 있었다. 큰 아이는 아침마다 나와 EBS 3학년 국어와 수학 문제집을 한 장씩 풀고 있는데 오늘은 어제 산 Grade 3 영어책과 EBS 수학 문제집을 혼자 풀었다. 싱가포르에 제 학년과 진도에 맞게 2학년 2학기 EBS 국어와 수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한국을 갔다가 미국으로 오는 사이 이 책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다행히 내년을 위해 미리 3학년 책을 사 온 게 있어서 이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한 장씩 함께 공부를 할 수 있고, 덕분에 우리는 한 시간을 때울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3학년 1학기 과정을 공부하며 선행학습을 시키는 양육자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반학기 정도 앞서가는 건 선행학습이라 말하지도 않겠지만)
아이가 문제집을 푸는 동안 나는 어제 H 마트에서 산 파를 다듬고, 소고기를 썰어서 소고깃국을 끓일 준비를 했다. 숙소 칼은 무뎌서 고기를 써는 게 아니라 거의 뜯다시피 조각을 냈고, 고춧가루를 볶는 냄새가 생각보다 많이 나서 다른 방에서 민원이라도 들어오는 건 아닌가 싶어 살짝 긴장을 했다. 숙소 살림에 비헤 소고깃국은 아주 맛나게 잘 끓였고, 그 사이 아이는 문제집을 거의 다 풀었고, 남편도 숙소에 도착했다.
작은 아이에게 주려고 삶은 달걀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는 순간 전자레인지에서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전자레인지를 열어보니 삶은 달걀 두 알이 모두 산산조각이 나서 전자렌지 내부에 새하얗고 노오란 눈이 내렸다. 전자레인지에 삶은 달걀을 그대로 넣고 데우면 터질 수 있다는 것을 태어나 처음 알았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고 지금까지 전자레인지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아이 이유식을 먹일 때에도 얼려둔 이유식을 중탕해 데워 먹였다. 전자레인지를 쓸 이유를 끝끝내 찾지 못해 써보지 않은 덕분에 달걀이 터져 처참한 꼴을 하고 있는 숙소 전자레인지를 닦고 또 닦아냈다.
아무튼, 점심을 뚝딱 한 그릇 해결하고 드디어 동네 놀이터로 갔다. 숙소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놀이터는 Ednean 공원 내에 있었다.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조금 놀다가 공원 산책로를 함께 걸었다. 걷다 보니 언덕 같은 곳이 나왔고, 우리는 언덕 위로 한달음에 달려 올라가 가져간 농구공을 굴리고 공을 잡는 놀이를 하고 놀았다. 작은 아이는 언덕 위에서 공을 따라 달려내려 오다 공과 함께 뒹굴었고, 뒹굴 때마다 웃었다.
다음에 눈이 오면 눈썰매를 사서 이 언덕에 다시 오자는 이야기를 하며 언덕을 달려 올라갔다 다시 달려 내려오기를 수차례 했다. 폐에 시원한 공기가 들어가서 상쾌하기 그지없었고, 추운 줄도 모르고 뛰고 뒹구는 아이들을 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공원과 놀이터를 오가며 우리는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신나게 놀았다. 오후 기온이 영상 5도 정도여서 시베리아 한파 정도는 아니니 나가 놀 수는 있었지만 손이 시린 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하루빨리 장갑을 사야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이들과 잠깐 앉아 쉬고 있는데 개 산책을 시키는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오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공원, 놀이터, 길에서 만난 사람은 총 5명이었고, 개도 총 5마리였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고 아이들이 다들 학교에 가고 어른들은 다들 회사에 가는 평일이라고 하나 사람과 개를 합쳐 총 10개의 생명을 만나다니. 여긴 도대체 인구밀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 찾아봤다.
2021년 기준 서울에는 1㎢에 15,699명이 살고, 2020년 기준 싱가포르에는 1㎢에 8,041명이 산다.
2020년 기준 매사추세츠에는 1㎢에 255.5명이 산다.
하루 종일 길에서 사람이 안 보일 수밖에 없는 인구밀도가 아닌가! 초밀집지역에서 거의 한평생을 살다가 길에서 사람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 곳에 온 셈이다. 이 변화가 너무 드라마틱해서 어색하다. 낯선 사람을 만나거나 상대하는 일이 적어서일까, 슈퍼나 카페에 가면 다들 상당히 친절하고 가끔 지나치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만난다. 아니면 사람을 만날 일이 잘 없어서 외로워서 그런 걸까. 다른 사람과 접촉하는 빈도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사이에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주변 환경에 대한 인지가 사뭇 다르게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을 다섯 명 만나면 개는 다섯 마리 이상 만날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있다. (개 다섯 마리의 목줄을 허리에 감고 산책을 하는 여자를 본 적이 있기에 사람 한 명이 개 한 마리를 산책시킨다고 속단할 수 없다.) 추운 겨울 외롭지 않게 다정한 사람들을 만나 교류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