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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 Amelie Jan 04. 2023

21세기 만난 머릿니 이야기

미국에 와서 숙소 생활 3주를 하는 동안 해결해야 하는 숙제는 차고 넘쳤다. 하루라도 빨리 집을 구할 것, 이사를 가자마자 큰 아이가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할 것, 버스 한 대 돌아다니지 않는 동네에서 슈퍼라도 마음 편히 갈 수 있게 차를 장만할 것,

그리고 어린이 머리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머릿니를 소탕할 것!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이었다. 잠들기 전 다 마른 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는데 뭔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먼지도 아니고 머리핀에서 떨어져 나온 반짝이도 아니었다. 경험자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서캐라 부르는 머릿니의 알이었다. 아이의 머리를 빗다 말고 인도네시아 발리 원숭이 숲에서 만난 원숭이처럼 아이의 머리카락 속을 들추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머릿니

내 머리 복잡하게 비치네

이쪽 머리에서도 저쪽 머리에서도

반짝반짝 머릿니

내 머리 아프게 비치네


사실 어린이 머리에서 이를 발견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에 아이의 머릿속을 헤집어 내 손으로 직접 살아있는 머릿니를 잡아 손톱 끝으로 꼭 누르고, 매트리스 커버부터 쿠션까지 모든 침구류를 살균 소독하고,  희한한 냄새의 이 잡는 샴푸로 온 식구의 머리를 감는 지리멸렬한 날들이 있었다. 머릿니는 아이의 학교 친구가 전해줬고(?), 아이의 학교에서는 가끔 이가 발견되었으니 6일, 9일 주기로 머리를 잘 관리하라는 메일이 오곤 했다. (서캐가 부화하려면 6-9일이 걸리고 7일 후면 성충이 되어 알을 낳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싱가포르가 더운 나라여서 이가 자주 나타나는 건 아니었고, 아이가 다닌 프랑스 학교에서 유독 이가 자주 출몰했다.


이는 잡으면 될 일이지만 이역만리 미국까지 가서까지 이를 박멸하겠다고 참빗을 움켜 줘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 상상만 해도 고단했다. 그리하여 미국에 도착해 머무는 숙소에서 아침저녁으로 참빗으로 아이들 머리를 빗겼고, 이것도 모자라 티브이를 보고 있는 아이 곁에 원숭이처럼 앉아 내 두 손으로 이를 잡았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바비 인형 뺨치게 가늘어서 늘 엉키고 설켜있었기에 머리를 곱게 빗어주고, 참빗으로 빗겨도 슥슥 속 시원하게 빗길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꼼꼼한 빗질로 아이의 머리카락은 늘 뜯겨 나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뒤통수 쪽에 거주(?)하는 이를 뒤지려고 머리를 숙이며 목이 아프다고 징징거리고, 옆머리를 헤집으면 티브이가 안 보인다고 징징거리고, 오래 앉아 있으면 앉아있기 싫다고 징징 거리를 아이를 달래야만 했다.


‘이 잡듯 뒤진다’고 표현할 때처럼 이를 잡기 위해 머릿속을 뒤적일 때에는 이를 보유 또는 소장하고 있는 이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심지어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도 이가 사는 머리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협조를 구하는 건 아이의 짜증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참을 인자를 수십 번 쓰다 끝끝내 소리를 빽 질러야 하는, 온몸과 마음이 물 머금은 솜처럼 축 쳐지는 일이었기에 자연스레 이가 사라질 수도 있으니 하루쯤 빗질을 하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는 자연스레 사라지지 않고, 인간이 반드시 박멸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낸 어느 날, 아이가 갑자기 난대 없이 빗질을 열심히 해대기 시작하더니 스스로 살아있는 이 몇 마리 잡았다. 이를 잡은 기쁨보다 스스로 빗을 잡고 빗질을 하는 아이가 신기해서 물어봤다.


“왜 갑자기 참빗으로 빗질을 했어?”

“오늘 내 머리카락이 부드러워서 내 힘으로도 빗질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이를 잡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머리카락이 부드럽지 않을 때 머리를 빗는 게 싫어. 그런데 이 이샴푸를 쓰니 머리카락이 부드럽더라. 그래서 해봤지. 엄마, 내일도 이 이샴푸를 쓰자. 그럼 내가 참빗으로 빗질을 할게.”


아이의 대답을 듣고 뭔가가 머릿속에 ‘쿵’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인간이 뭔가 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게 하는 힘, 혹은 어떤 일에 의욕적으로 덤빌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여태껏 아이는 이 잡는 일에 비협조적이었는데 빗질하는데 무리가 없는 부드러운 본인의 머리카락을 확인한 순간 스스로 빗질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어른이 보는 문제점과 아이가 바라보는 문제점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를 잡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아이의 머리카락이 쥐어 뜯겨 나가는 현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뜯겨 나가며 발생하는 아픔보다는 머릿니 한 마리를 일분일초라도 빨리 잡는 게 중요했다. 반대로 아이는 머릿니를 잡느라 머리카락이 뜯겨 나가는 아픔이 너무 컸고, 머리에 이가 살아도 좋으니 머리카락이 뜯겨 나가지 않고,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고 싶지 않아 했다.


당사자가 생각하는 문제점이 해결되는 순간, 즉 엉키고 설킨 머리카락이 부드러워진 순간에 아이는 스스로 빗을 들고 본인이 만족하는 수준까지 빗질을 했다. 아주 열심히 이를 박멸하겠다는 목표를 스스로 인식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를 박멸하기 위해 필요한 게 뭔지 나에게 되물어보고, 빗질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동생의 머리를 빗겨주겠다고 했다. (다행히 동생 머리카락은 부드러워 조기에 이를 박멸할 수 있었다.)


며칠 지속된 아이의 자기 주도적인 빗질을 보면서 양육자로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이를 잡겠다는 목표 하나로 아이의 불편함은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였을 때, 아이는 이는 잡아야 하지만 과정 자체가 불편하고 힘들어서 이를 잡는다는 목표를 달성하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본인의 머리카락이 부드러워지고 빗질이 수월해지자 본인 스스로 이를 잡겠다는 목표를 설정했고, 적극적으로 목표 달성을 위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즉,  불편하고 어려운 상황을 제거하자 본인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명확해졌고, 보이지 않던 목표가 선명하게 보이게 된 셈이다.


양육자는 아이의 목표를 그려주고 막무가내로 아이보다 앞서 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양육자는 아이의 목표가 어디인지도 보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수만 가지 상황에서 아이가 불편하고 어려워하거나 지치게 만드는 지점들이 어디인지 같이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닐까? 모든 어렵고 불편한 상황을 양육자가 모두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어디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 순간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멀리 있는 목표를 향해 평안한 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다다르자 아이의 머릿니를 잡다가, 또 아이가 스스로 머릿니를 잡는 모습을 보면서 한겨울에 찬물로 세수를 한 듯 정신이 맑아졌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머릿니를 박멸하겠다는 목표를 공책 맨 앞장에 써 놓고 매일매일 나 또는 아이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기록하는 사람의 자리가 아니었다. 머릿니를 없애는 과정에서 아이의 역할은 무엇인지, 아이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힘들어하거나 버거워하는지 옆에서 봐주는 사람, 그리고 아이를 힘들게 하는 문제점이 있다면 그때 서로 마주 앉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같이 방법도 찾아보고 계획을 세우는 것도 도와주는 사람의 자리가 바로 나의 자리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를 박멸했다.


식구 중 누구도 머리를 벅벅 긁지 않는다. 머릿니를 잡는 와중에 집을 구했고, 아이는 집 근처 학교에 등교를 시작했고, 온 식구의 발이 되어줄 차도 구했다. 아이가 학교를 다닌 지 꼭 일주일이 되었고, 새로운 학교, 선생님, 친구들과 생활하는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이를 잡던 날들, 아이가 스스로 참빗을 들고 제 머리를 혼자 빗던 날을 떠올린다. 그러고는 아이보다 먼저 앞서 나가지 않고 아이가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보고, 지금의 아이 눈을 더 자주 더 오래 바라보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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