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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 Amelie Jan 06. 2023

오늘도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

둘째를 임신하고 36주 만삭의 임산부가 되었을 때, 남편이 먼저 싱가포르로 가서 우리가 살 집을 구했다. 싱가포르에 도착할 무렵 큰아이는 42개월, 작은아이는 2개월, 나 혼자 큰아이 유치원도 보내고 신생아도 돌볼 수 있는 집과 주변 환경이 필요했다. 한국 사람이 많이 모여 산다는 곳, 남편의 회사가 가까운 곳, 월세가 저렴한 곳 등 여러 가지 조건의 집을 남편은 혼자 알아보고 다니며 사진을 찍어 톡으로 보내왔다. 남편이 나에게 물어봤다. 


“내가 출근하고 나서 애들이랑 지내는 걸 상상해 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뭔지 떠올려봐. 우리가 집을 구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 같아.”

“걸어서 5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어야 해.”


신혼살림을 동대문구 전농동에서 시작했다. 버스를 타면 회사가 있는 광화문까지 바로 갈 수 있어 선택한 곳이었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아무 일도 일어날지 않을 것 같은 지극히 단조로운 생활을 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작은 슈퍼를 드나들어도 둘이 먹고사는 것에 문제가 없었고, 야근을 하고 회사에서 밥까지 먹었으니 주중 일상은 단조로웠고, 주말에는 신혼을 즐긴다며 밖으로만 쏘다니느라 바빴다.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6개월이 될 무렵 여동생 부부와 떨어져서 대구 외할머니댁에 사는 26개월 된 조카를 데려와 돌보기 시작하면서 동네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6개월 영아는 반응이 제한적인데 비해, 26개월 유아의 반응은 꽤 다양해서 조카를 아이와 같이 키우면서 육아가 재미있기도 했다.)  유모차를 끌고 10분을 걸으면 청량리 청과물 시장이 나온다. 봄에는 딸기를 샀고, 여름에는 복숭아를 샀고, 가을에는 대봉 홍시를 사 왔다. 가끔 버스를 타고 경동시장도 갔다. 잘하지도 못하는 나물을 무친답시며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나물을 잔뜩 사 오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 하교를 하면 동네 곳곳에 있는 놀이터를 찾아다니며 놀았고,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도 아주 크고 근사한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길 하나 건너 골목길을 걸어 다니며 동네 구경을 하다가 도서관을 발견한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대로변이 아닌 주거 지역 안에 있는 건물이라 도서관이라고 생각을 못한 곳이었다. 조카 손을 잡고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한 손으로 끌고 도서관에 들어갔다. 유아 아동 코너는 1층에 있었고, 유아들이 자유롭게 다니고 앉을 수 있도록 마룻바닥으로 꾸며져 있었다. 꽃피는 봄부터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녔는데 어린이집 하교를 하면 간식을 조금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거기서 엄마들의 책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곧바로 신청을 했고, 모임 회장을 어쩌다 맡았고, 1년 동안 엄마들과 동화책을 읽었다. 그리고 도서관장님의 표창장까지 받았다!


이사짐 정리하다 발견, 가보로 남겨야해! ©아멜리


26개월과 6개월이었던 아이들이 34개월, 15개월이 될 때까지 출근하듯 도서관을 향했다. 아이들은 거기서 동네 친구와 이모들을 만났다. 내가 읽어주는 책이 재미가 없으면 옆에서 다른 책을 읽고 있는 이모들 곁으로 아이들이 가기만 하면 되었고, 다른 아이들도 내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도서관 공동육아란 이렇게 교육적이면서도 정겹기까지 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책모임에서 만난 엄마들인 나보다 육아 경력이 길었고, 돌도 안된 아이와 조카를 같이 보는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줬다. 아이들 책과 성장, 우리의 삶이 버무려졌던 대화들은 알알이 포도처럼 꽉 차 있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에 덜 외로울 수 있었고, 느닷없이 아이 둘을 키우는 나에게 도서관은 기댈 언덕을 주었다. 


이런 진한 기억이 있었기에 싱가포르에서 살 집 옆에 도서관이 있어야 했다. 남편이 혼자 구한 아파트 건너편 쇼핑몰 4층에 도서관이 있었다. 나는 큰아이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고 갓난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에 갔다.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 모유수유실을 들러 아이 기저귀를 갈고, 젖을 먹이고 나면 아이는 낮잠을 청했고, 나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집안일을 간단히 하고 큰 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도 어김없이 간식을 조금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사서 서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듣기도 하고, 아이들은 알아서들 책을 골라와 그림을 찬찬히 훑어보기도 하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가끔 말레이시아어나 중국어로 된 그림책을 가지고 오면 익숙하지 않은 그림을 같이 보면서 내용을 상상하기도 했다. 


어떤 공간에 가면 그 공간이 주는 정서가 있다. 도서관이 주는 정서는 키즈 카페와 다르다. 나에게 도서관은 그림과 글로 만들어진 상상의 집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도서관에 있다. 글자를 읽지만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보면서 그 뒤에 등장할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 도서관이 아니라면 이런 활동을 상상할 수 있을까? 오래된 나무 책장들 사이를 걷는 느낌, 손때가 묻은 책을 들여다보며 이 책을 이미 읽은 누군가와 내가 책으로 연결되는 느낌, 활자 사이를 오가던 눈길이 창가에 머물렀다가 새로운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 이 모든 것이 도서관이라는 공간과 함께 머릿속에 남아 지우고 싶어도 잘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지는 기억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가끔 고요한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다녔던 도서관 어느 구석 자리를 떠올리고 이내 마음이 평온해지 듯 말이다.


미국에 와서 사는 게 안정되었다고 느낀 순간은 처음으로 도서관에 간 날이었다. 가자마자 대출증을 만들었고, 큰아이가 좋아하는 시리즈와 작은아이가 관심을 보인 장난감을 빌려왔다. 물론 나도 책을 빌려왔고, 진도가 잘 안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도서관 가입비가 따로 있었고, 대출 기한을 넘으면 벌금도 냈다. 반면에 미국은 가입비가 없고, 대출 기한이 없다. 빌릴 수 있는 책과 장난감 수에 제한이 없고, 원하는 대로 빌려가고 대출 기간도 자동 연장이 된다. 사실 이런 시스템은 한국에서도 싱가포르에서도 경험한 적이 없기에 신기했고, 시스템에도 땅덩이 넓은 나라의 여유가 있구나 싶었다. 도서관에는 5세 미만 아이들을 위한 책 읽기 모임이 주중 2회 열렸고, 어른들의 독서 모임도 안내하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영어 원서를 읽고 도서관 독서 모임에 참석하길 온 마음으로 기대한다.) 


좋아하는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의 이름을 기억하고, 신간이 나오면 한달음에 달려가 읽어보고, 본인만의 책 취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삶에 대해 늘 생각한다. 책을 가까이한다는 것은 지독하게 고통스럽거나 외로운 시기를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과 같다고. 책을 고르는 순간들은 인생에서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실패하며 배우는 순간들과 같고, 그렇기에 좋아하는 책을 끝끝내 만날 때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독서는 마음과 머리로 세상을 열어젖히는 순간과 다름없다. 


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일상을 유지하는 것은 어릴 적 학교 도서관이 준 따스함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서다.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끄적거린 덕분에 담임 선생님은 여름 방학 때마다 ‘여름 독서반’에 나를 추천해 줬고, 방학이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짓기를 하며 놀았다. 학원을 다닐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에 더운 여름 갈 곳 없는 나에게 학교 도서관은 놀이터 그 자체였다. 모래밭에서 뒹굴 듯 책을 고르고, 미끄럼틀과 시소를 타듯 친구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과 생각을 글자에 담아 글로 써 내려가는 순간 머릿속으로 상상한 그 세계는 굳이 실제 하지 않아도 영원할 것 같았다.  이런 기억 덕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에 아이들을 적극적으로 초대했다.    


오늘도 우리는 도서관에 간다. 어떤 책과 이야기를 만날까, 그리고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생각을 하고, 품에 책을 안고 도서관을 나설 때 얼마나 설레고 기쁠까? 상상만 해도 벌써 마음이 쿵쾅거린다.    

 

보스턴 공립 도서관 외관, 곧 기차타고 가볼테다 © 아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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