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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 Amelie Jan 20. 2023

이모, 제2의 양육자

최근 나의 일상은 단조롭고 고요하다. 큰아이가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고, 작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출근하는 남편이 문을 닫고 나가면 시간이 멈춘 듯 고요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집안은 내가 만드는 소리로 가득 찬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세탁기 소리, 마룻바닥과 실내화가 만나 만드는 마찰음, 서랍 여닫는 소리, 나도 모르게 내뱉는 혼잣말…… 모두 내가 만들고 나만 듣는 소리다.


오랜만에 두어 달 집안일을 하다 보니 손끝은 항시 거칠거칠하다. 대용량의 핸드크림을 거실에 꺼내 놓고 수시로 바르고 고무장갑을 껴도 거칠어진 손끝은 부드러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손에 물 닿는 일이 점점 하기 싫어진다. 찬물에 쌀 씻는 게 제일 싫을 정도이다. 걸레질을 하거나 아이들 옷을 개거나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싱가포르에 있을 때 같이 살았던 이모다.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 지난 4년 동안 살림살이를 내 손으로 하지 않았다.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내가 출근한 사이 아이들을 돌봐주는 이모가 있었다. 퇴근하고 들어가면 그녀가 차려준 밥을 먹었고, 그녀는 설거지를 다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아이들 잠자리를 챙겼다. 가끔 나와 남편이 저녁 모임이라도 가는 날에는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워주기도 했다.


처음에 고용한 필리핀 이모는 우리 집에서 근무한 지 6개월이 될 무렵 우리 집을 떠났다. 어느 날 이모의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며 필리핀에 다녀오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러라며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고, 떠나는 날까지 계산해서 급여를 미리 줬다. 2주 후 이모가 탔어야 하는 비행기는 돌아왔지만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재택을 하며 아이를 돌보고 다른 이모를 구하러 다녔다. 그렇게 나는 ‘시마’를 만났고, 아이들은 그녀를 ‘시마 이모’라고 불렀다.


시마는 인도네시아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섬, 롬복에서 왔다. 나와 나이가 같았던 시마는 나보다 키가 한참이나 작아서 어깨동무를 하면 열 살 조카를 안는 느낌이 들었다. 시마는 오토바이 사고로 남편이 떠난 후 딸 하나를 키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롬복을 떠나 맨 처음 가정부로 일하러 갔던 나라는 사우디였다.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갔냐고 물어보니 인도네시아인이 사우디로 가는 게 가까운 싱가포르로 오는 것보다 돈이 적게 들고 쉬웠다고 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이지만 돼지고기 요리를 할 수 있다고 했고, 매일 5번 기도는 하지 않지만 라마단 금식은 꼭 지켰다.


그렇게 사우디에서 5년을 일하고 싱가포르에 온 지 5년이 되었을 때 나를 만났다. 해외에서 일한 지 10년 가까이 되었지만 딸아이는 딱 한번 만났다고 했다. 일곱 살 때 헤어진 딸아이가 열일곱이 될 때까지 한 번 밖에 못 만났다는 시마는 아이를 자주 보는 것보다 돈을 벌어서 학비를 보내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 집에 오기 전 시마는 고령의 할머니를 돌보았는데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고용인이 시마를 내보냈고 본국에 다녀올 기회도 얻지 못하고 다시 일을 구해야 했고 우리 식구를 만났다.


싱가포르에서는 여성 외국인 노동자를 가사 도우미로 고용할 수 있다. 보통 이들을 헬퍼(Helper)라 부른다. 이들은 주로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많이 오고 미얀마 출신도 있다. 고용인과 2년 계약을 하고 입국을 하게 되는데 정부 지침으로는 주 1회 휴일을 반드시 제공하라고 하지만 집집마다 제각각이다. 한 달에 하루 쉬게 하는 집도 있고 일절 휴일을 안 주는 집도 있다.


헬퍼는 재계약을 하는 경우에만 고용인이 항공권을 제공하고 유급 휴가로 2주가량 본국을 다녀올 수 있다. 재계약이 안되면 돈을 벌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다른 가정으로 옮겨야 해서 본국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가끔 집주인들이 헬퍼가 마음에 안 든다고 당일로 고향에 보내버리는 일이 있기도 하고, 맨 처음 우리 집에 온 이모처럼 본인이 도망을 가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2년에  한 번 집에 다녀올 수 있다. 고용인이 장기 휴가를 가며 이모를 본국에 보내주기도 하지만, 집 외에는 아무곳에도 가지 마라며 이모를 집에 가둬두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 싱가포르에 가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낼 때,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여자들이 모두 엄마인 줄 알고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이 헬퍼였고, 등하교 시간마다 헬퍼들을 만나면서 친해졌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이모는 3층 대형 주택에 형제 식구가 같이 살아 총 10명이 사는 집에서 일을 했는데 집청소, 개 두 마리 목욕, 자동차 2대 세차, 식사 준비, 빨래를 했다고 했다. 고용주가 식사로 라면만 줘서 하루 삼시 세 끼를 라면으로만 때운 탓에 늘 배가 고팠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고봉밥을 해서 먹는다며 밥을 많이 먹어서 다행이라 했다. 또 어떤 이모는 고용주가 화가 나면 때린다고 했다. 집주인 남자도 여자도 화가 나면 때린다고 했다. 어떤 이모는 밤 11시가 되면 지하주차장에 내려와 세차를 했다. 집안일을 다하고 세차할 수 있는 시간이 그때 밖에 없다고 했다. 어떤 이모는 집주인이 집 안에서 샤워를 못하게 해서 아파트 단지 내 공용 샤워장에 내려와 샤워를 하고 집에 들어간다고 했다.


그러다 코비드가 터졌고, 이모들은 모두 그녀들의 직장에 갇혔다. 시마도 마찬가지, 그녀도 나와 24시간 내내 붙어서 3년 가까이를 지냈다. 아이들은 학교를 못 갔고, 나는 출근 대신 재택을 했고, 그녀는 직장에서 직장 상사와 3년 가까이 붙어 산 셈이었다. 나도 회사 대표랑 한 자리에서 하루 종일 일하라고 하면 못할 텐데 시마는 얼마나 힘들고 불편했을까! 코비드로 락다운 상황이 지속될 그 무렵 싱가포르에서는 헬퍼들의 자살, 폭행 등 사건 사고가 많았다.


아시아에서 해외 여성 노동자를 입주 도우미로 고용하는 곳이 싱가포르와 홍콩 두 곳이다. 싱가포르의 거주 공간이 홍콩보다는 조금 더 크다고는 하지만 헬퍼들의 주거 공간이 열악한 건 똑같다. 나도 시마를 고용했을 때에는 작은 방이 있어서 그녀에게 내어주었지만 이사를 하면서 방이 2개로 줄어 내어 줄 곳이 없었다. 거실 옆에 작은 창고 같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 아이들 놀이매트를 깔고 매트리스와 옷장을 넣어주고 커튼을 치고 방처럼 만들어 지낼 수 있게 했다. 이사할 때 짐을 빼면서 시마에게 미안했다. 이렇게 작은 곳에서 그 작은 몸하나 뉠 수 있게 해 주고는 사람처럼 살게 해 줬다고 생각했었나 싶었다. 어떤 이모들은 부엌 뒤 창고에서 살기도 하고, 방이 없어서 주방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고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하기도 하니 이건 양반이라고 생각했었나 하며 자책했다.


싱가포르는 정부에서 정한 최저 임금이 없다. 일반 서비스직이나 아르바이트 시급 등을 업종별로 다르게 정부에서 제시하는 것이지 최저 임금에 따라 적용되지는 않는다. 헬퍼들의 급여가 턱없이 낮아서 최저 임금을 정해버리면 헬퍼들을 고용할 수가 없다. 필리핀에서 온 헬퍼들은 영어 소통이 원활하다는 이유로 급여가 조금 높은 편으로 월 90만 원 정도이고, 인도네시아, 미얀마에서 온 헬퍼들의 급여는 이보다 낮은 60만 원에서 70만 원 수준이다. 코비드로 인해 이동이 어려워서 헬퍼들의 급여가 조금 더 올랐다고는 하나 100만 원을 넘는 경우가 흔하지 않다.


이모들의 급여 수준은 본국의 현지 물가를 고려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인도네시아 경찰의 한 달 급여가 30만 원 수준이니 이 정도면 한 가정을 먹여 살릴 수준인 셈이다. 시마도 쓰나미로 인해 쓸려간 집을 다시 짓느라 월급의 상당 부분을 인도네시아 롬복으로 보내고 있었다.


가끔 한국 뉴스에 우리나라도 해외 여성 노동력을 가정 도우미로 활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모가 있어서 내가 일을 할 수 있었고,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다. 이모가 없었다면 나는 싱가포르에서 다시 직장을 구한다고 상상을 못 했을 수도 있고, 허덕이며 아이 둘을 키웠을 수도 있다. 순진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육자로서 쏟아붓는 나의 노동력을 다른 한 여성에게, 그것도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서 온, 그것도 자신의 아이를 떼놓고 돈을 벌기 위해 온 여성에게 전가하는 게 불편하다. 한 아이는 온 세상이 같이 키운다고 말만 하지 결국 나의 육아 노동이 다른 여성에게 이전된 것 뿐이고 온 세상이 함께 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녀는 그녀의 땅에서, 제 자식이 크는 걸 보는 재미에 살 수 없을까 생각하면 그녀가 가엾다. 그리고 나는 왜 지도를 봐도 어디인지 잘 모르는 곳에서 온 여성에게 맡기고 커리어인지 돈인지 뭔지를 위해 아등바등거리고 있는가 생각하면 나도 가엾다.  


나는 미국으로 오면서 시마도 없고 직장도 없고 손끝은 모두 갈라졌다. 나보다 조금 더 아이를 키운 여성들을 만나면 가끔 물어본다.

"언제까지 애들한테 엄마가 필요해요?"

여성들은 말한다.

"조금 편해지긴 할 텐데 애들은 커도 늘 엄마를 필요로 해요."


나는 아침에 정갈하게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하는 상상을 한다. 기차를 타든 차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출근을 하고 카페라떼를 한 잔 마시고 거북목이 될 정도로 노트북에 머리를 파묻고 심각한 척하는 나를 상상한다. 그런데 시마가 없어서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일을 하고 싶은 것인지 시마가 필요한 것인지 가끔 헷갈릴 때도 있다.


해가 바뀔 무렵 시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이들이 시마 이모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은 영상과 함께. 시마는 아이들이 아주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헤어질 때 시마가 흘린 눈물과 함께 돈 많이 벌어서 더 자주 딸을 만나면 좋겠다고 내가 건넨 말이 기억났다. 싱가포르에 사는 인도네시아 사람 시마도, 미국에 사는 한국 사람 아멜리도 모두 잘 버텨야 한다.     


마음이 고왔던 시마, 꼭 잘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헤어지던 날 ©아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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