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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 Amelie Jun 13. 2023

결핍이라 쓰고 그리움이라 읽는다


글모임에서 <결핍>이라는 글감으로 쓴 글입니다.


—————-


J에게,


내가 사는 뉴잉글랜드에 날카롭고 스산했던 바람이 물러가고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햇살이 바람에 흩날리는 봄이 찾아왔어. 영원히 동토에 살 것만 같았던 지난겨울에는 차갑고 시린 내 손발에 신경이 곤두선 나머지 내 마음마저 옹졸해지는 것 같았는데, 봄 햇살에 마음이 부풀어 올라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행이라는 마음이 암탉을 좇아가는 병아리처럼 따라와.


네가 세상을 떠난 지 일 년이 되어 간다. 올해 설날에는 너의 아이 D에게 책 몇 권을 우편으로 보냈어. D에게 새해 선물로 뭘 보낼까 고민하면서 내가 고를 줄 아는 선물이 책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아쉽기도 했고 한편으론 책이라도 고를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어. 미국 작가가 쓴 그래픽 노블 몇 권과 국내 작가의 동화를 고르면서 D가 멋지게 한 해를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멀리서 사는 이모가 D를 응원하는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랐어. D에게 너의 빈자리가 너무 크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황한 꿈은 애당초 꾸지도 않았어. 그러기엔 D에게 네 자리는 크고 넓었으니까.


그날 나는 싱가포르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덥지만, 여유 있는 토요일 아침을 보내고 있었어. 큰아이는 남편과 함께 테니스 수업을 하러 갔고, 나는 작은 아이와 거실에서 레고로 도로를 만들어 레이싱카 놀이를 하고 있었어. 이른 아침부터 너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어. 한 달 전 너의 생일에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내면서 10월에 잠깐 한국에 들어가니 그때 만나자는 인사를 나눈 터라 네가 나에게 한국에 오면 뭘 먹고 싶냐고 물어본다던가, 요즘 핫한 곳을 미리 알려준다던가, 아이들과 같이 갈 곳을 알아냈다는 정도의 메시지일 것으로 생각하고 메시지를 열었어.


‘OOO의 배우자 ㅁㅁㅁ 께서 별세하셨기에’로 시작하는 <부고> 메시지였어. 너와 너의 남편 이름, 그리고 사이에 배치된 ‘의 배우자’를 읽고 또 읽었지만, 이 부고 메시지가 도대체 누구의 부고를 뜻하는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없었어.  핸드폰을 오른손에 쥐고 마네킹처럼 굳어버린 내 몸 위로 작은아이가 폴짝 뛰어오르고 ‘엄마’라 부르는데도 아이의 무게감도, 목소리도 느껴지지 않았어. 아이가 내 몸을 쥐고 흔들어 비로소 이 메시지가 누구의 부고를 말하는지 알았고, 이내 양쪽에서 당기고 있던 팽팽한 줄이 속절없이 끊어지듯 내 마음이 흘러내렸어.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우리는 만났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우리 둘이 함께 걸어갔지. 언덕을 내려가다 사거리가 나오면 너는 왼쪽으로, 나는 오른쪽으로 꺾어야 했는데, 교실에서 빠져나와 사거리가 나올 때까지 나누던 이야기는 언제나 끝이 나지 않았고, 그 사거리에 있던 전봇대 아래에서 우린 못다 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더 해야만 마무리할 수 있었어. 그러고 뒤돌아서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한 번 더 돌아보고 손을 크게 흔들며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나눴어.


그해 여름 음악 실기 시험으로 피아노 연탄곡을 준비하면서 너희 집에서 피아노 연습을 했어. 너는 언니 오빠가 더 이상 너와 놀아주지 않는다며 볼멘소리했고, 나는 연년생과 여덟 살 차이 나는 동생들이 날 성가시게 한다며 하소연했어. 그때 실기 점수가 몇 점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연습하며 즐거워했던 날들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마음에 남았어.  


우리는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 디제이처럼 내레이션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와 하굣길에 못다 한 이야기를 꾹꾹 눌러쓴 편지를 주고받았어. 그 속에 열세 살의 우리가 가진 고민과 생각들이 손에 잡힐 듯 살아있는 모습으로 꿈틀거렸어.


각자 다른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엔 늦은 시간까지 전화통을 붙잡고 수다를 떠느라 엄마들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고, 대학생이 되면 얼마나 멋진 사람으로 탈바꿈할지 궁금해했고, 그만큼 우리의 미래를 기대했지. 스무 살이 넘어 밤새 술을 마시며 각자의 아픈 연애사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좋아하는 작가와 책을 서로 소개하고 각자 쓴 글을 돌려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정작 우리 밥벌이는 뭐로 해야 할지 제대로 고민도 못 하고 대학을 졸업했어.

   

그러던 어느 날 너와 연락이 끊겼고, 몇 해 지나 불쑥 나를 찾아온 너는 아팠다고 했어. 다행히 몸이 많이 좋아진 너는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게 되었어. 내가 싱가포르로 떠나기 직전 우리는 더 자주 만났는데 그때 너는 바람이 불면 훅 날아갈 것 같은 종잇장 같은 몸이었지만 체력이 많이 좋아졌다며 환하게 웃었어. 몇 해 연락이 없던 너를 다시 만났을 때, 혹은 싱가포르로 가기 직전 너에게 어디가 얼마나 아팠냐고 물어보고 더 살뜰히 챙겼어야 했는데 언젠가 네가 이야기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큰 병은 아닐 거라 속단하며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어.


네가 속절없이 떠난 후 너의 언니와 통화를 하며 그사이 네가 얼마나 아팠었는지, 식구들 모두 너의 완치를 위해 얼마큼 애를 썼는지, 병세가 짙어질 무렵 고통이 너무 심해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어쩌면 너는 나에게 신체의 고통을 나와 나누는 대신 앞으로 펼쳐질 삶을 기대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너의 아픔을 내가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한없이 미안해져.


돌아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여러 친구를 두루 사귀지 못했어. 학창 시절 반장도 하고, 장기 자랑 시간에 사회를 볼 정도로 사람들 앞에 잘 나섰지만, 여러 명이 속한 그룹은 내 성격에 맞지 않았어. 한두 명의 친구와 천천히, 깊이 있게, 서로 스며들 듯 만나는 걸 좋아했어. 단짝 친구와 소소한 일상에 있는 마음과 꿈꾸는 미래를 나누고, 우리의 비슷한 점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며 즐거워했어. 눈에 보이지 않는 모래성을 친구와 함께 만들어 가는게 우정이라 여겼고, 그 모래성은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기에 친구와 서먹해지는 순간이 와도 언젠가는 다시 그 모래성을 같이 쌓을 수 있을 테니 괜찮다고 생각하곤 했어.


사람을 두루 만나지 못하는 나의 성격은 여전하고, 해외 살이를 하면서 사람을 깊게 만나는 일은 사막에서 물을 찾는 일처럼 어렵고 고단한 일이 되어 버렸어. 나를 온전하게 이해받지 못하는 관계는 처음부터 만들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마음의 벽을 세우고 상대방을 마주하는 사람이 되었어.


어느 순간 이런 나의 성격이 엄청나게 큰 단점이자 약점으로 다가왔고, 결국은 사람을 제대로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누구보다 사교적이라 여긴 나의 모습이 모두 헛된 망상처럼 느껴졌어. 한때 나의 다이어리를 꽉 채웠던 각종 만남과 모임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커다란 흰 종이를 멍하니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었어.


사춘기 때부터 온 마음으로 너를 만난 내가 너를 떠나보내며 한 가지를 깨달았어. 너를 떠나보낸 건, 네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 이상이었어. 너라는 우주가 내가 만든 우주에서 사라진거야.


철들고 나서 내가 느낀 인간관계에 대한 결핍은 눈길을 주고 손을 쓰다듬던 이들을 향한 그리움이었어.


나는 너에게 못다 보여준 나의 그리움을 너의 아이 D에게 보여주고파 책을 보냈는지도 몰라. 며칠 전에는 너도 아는 나의 친구 A가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감자빵을 주문해 보냈어. 미국으로 이사와 가까워진 동네 친구에게 내가 담근 김치와 잡채를 나눠주곤 해.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느닷없이 메시지를 해서는 추운 날씨에 대해 불평하다가 보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를 해.


어쩌면 나는 인간관계 자체에 대한 결핍이 있기보다는 애틋한 마음을 보여주고 또 보여주고, 계속해서 보여주다 끝끝내 바닥까지 다 드러내고 보여주고 싶은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하며 살았을지도 몰라.


코비드로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이 이동을 멈췄을 때, 코비드가 끝나면 태국 방콕에서 만나 신나게 놀자는 약속을 했었지만, 우리가 그곳을 함께 갈 수 있는 날은 끝끝내 오지 않았어. 지난해 그곳을 짧게 다녀오는 길에 여기서 다시 만날 수 없는 네 생각을 하며 유리로 된 코끼리 모형을 사 와 너의 남편에게 전했어. 열세 살에 만나 마흔셋에 너를 보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또 한 번 마음이 아팠다.  


그립고 보고 싶은 J야,

봄바람이 불고 꽃가루가 눈처럼 날린다. 산책하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만나면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꽃망울 터지듯 네 생각이 불쑥 올라온다.   


다음 세상에서 너를 다시 친구로 만나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연탄곡을 치고, 하굣길에 다리가 아플 때까지 전봇대 아래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편지지에 흘러넘치도록 생각과 마음을 쓰고 또 써서 나누고 싶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기 전에 너를 한눈에 알아보고 달려가서 진하게 안아주고 싶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너를 생각하며 편지를 썼다.


2023년 6월 11일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멜리가


기어코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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