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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 Amelie May 28. 2023

추월을 대하는 러너의 자세

오랜만에 이른 아침 달리기를 했다. 마라톤 대회가 보통 7시에 열리는데 여기서 아침 7시에 달리기를 해본 적이 없어 그 시간대의 공기와 햇살과 내 몸은 어떨지 궁금해 눈뜨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요즘 보스턴은 아침 해가 오전 5시 30분에 뜨기에 아침 7시도 그리 이른 시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모나지 않은 공기와 뜨듯한 햇살을 선사했고, 내 몸뚱이만 침대에서 덜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늘 달리는 길로 달리는 데 뒤에서 이어폰 너머로 누군가가 나를 향해 뛰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자 한순간 나를 추월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복장으로 달리기를 하는 여성이었고, 보폭이 그리 넓지도 않고 발을 높게 들지도 않았는데 속도는 나보다 훨씬 빠른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나보다 한참 앞서 달려 나갔고, 난 기름칠이 필요한 자전거 바퀴처럼 삐그덕거리며 달렸다.


3킬로 정도 달리고 나면 몸이 풀리고 팔다리 움직임이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다. 아까 만났던 여성이 다시 시야에 들어온다. 달리면 달릴수록 그녀와 가까워지는 걸 보니 그녀의 속력이 줄어든 모양이다. 그녀가 갑자기 걷기 시작한다. 내 속력이 빨라지는 시점이었기에 나는 그녀를 추월했고, 그녀는 나에게 추월당했다.


추월할 때 기분이 좋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녀한테 추월당할 때 내 몸 상태는 침대에서 빠져나온 지 십 분이 채 되지 않은 때였으니 지금은 내가 충분히 추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듯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 허벅지에 들어가는 힘을 낱낱이 느끼기 시작하면 링거 주삿바늘을 통해 항생제가 온몸에 퍼지듯 ‘힘들다’는 신호가 퍼지기에 반드시 딴생각을 해야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막 추월한 여성이 지금 20킬로째 달리는 중이었다면, 그녀는 당연히 잠깐 걸어갈 수도 있고, 고작 3킬로 달린 나에게 추월당할 수도 있다. 앞서 그녀가 나를 추월할 때를 돌아보면 그녀는 안정적으로 달리고 있었기에 이제 막 침대에서 나온 나를 아주 쉽게 추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서로 추월하는 순간만 두고 누가 누구보다 잘했다느니, 누가 더 낫다느니 평가할 수 있을까?


그래, 누가 나를 추월하면 그/그녀는 나보다 짧은 거리를 달려서 몸 상태가 꽤 좋은 상태일 거야. 아마 오늘 유독 컨디션이 좋을지도 모르지. 내가 누군가를 추월하면 추월하는 시점에 내 컨디션이 나름 괜찮았던 거야, 그렇다고 내가 그/그녀보다 더 잘한다고 할 수도 없어, 내 컨디션을 알지만, 그/그녀의 상태는 내가 알 수가 없거든. 아마 한 100킬로를 달리는 중일지도 몰라.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내 속력대로 달리거나 속력을 조금 더 내어보려 애쓰는 것, 그것뿐이었다. 괜히 남과 비교하며 속상해하지 말자거나, 비교해서 얻는 건 상처밖에 없다는 말 같은 건 필요도 없다. 그저 내가 달리는 그 길과 내 호흡과 내 허벅지의 고통에 집중하자는 것.


길고 긴 오르막을 다 오르면 오른쪽 도로로 진입한다.

한창 달리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나를 추월한다. 조금 걷고 살살 뛰며 속도 조절을 했나 보다. 아무튼 그렇게 멈추지 않고 달리는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데, 뒤에서 다른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곧 나를 추월해 앞지른다. 나이가 나보다 한참은 많은 듯 보이는 남성이다.


그는 이제 막 달리기 시작했는지 보폭도 넓고 지면에서 꽤 높이 뛰어 달려 나간다. 오늘 아침 난 여러 명에게 추월당하며 누군가의 뒤통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달린 셈이 되었다.


우리 집에 다다라 난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나를 추월한 그녀는 잘도 달려 나보다 한참 앞이었는데, 나를 추월하고 달려 나간 남성에게 추월당했다.


이것이 인생이다.

각자의 속도로 밥그릇에 꼭꼭 눌러 밥을 푸듯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자, 아니 살아내자.

정답이라 할 수 있는 속력도 방향도 없다, 내 마음이 이끄는 곳과 내 두 다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정답이다.


지금, 어디를 향해 어떤 속력으로 달리고 있습니까?


아침 바람을 가르며 7.5km를 달렸다 ©아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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