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500번의 생리를 할 조카에게 360번 생리를 한 이모의 편지
재인아,
동쪽에서 해가 뜰 때 집 어귀에 드리운 나무 그늘이 길어지고, 해와 달이 서로에게 제 자리를 내어줄 때면 선선한 기운이 느껴져. 약속 없이 찾아온 손님처럼 내가 살고 있는 보스턴에 가을이 찾아왔어. 우리가 신나게 노느라 여념이 없었던 지난 여름 동안 지구는 태양 둘레를 묵묵히 돌고 있었나 봐.
지난 8월 보스턴에서 이모랑 사촌 동생들과 보낸 시간은 어땠니? 5학년 2학기는 순조롭게 시작되었니? 학교에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네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소식도 나누고, 미술 학원도 다시 가며 즐겁게 지내고 있니? 네가 한국으로 돌아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네가 어떻게 일상을 채우고 있는지 궁금하고 네가 보고 싶기도 해.
몇 달 전 네가 생리를 시작했다는 소식은 너희 엄마를 통해 전해 들었어. 충무로에 있던 산부인과에서 네가 태어난 날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한데, 마냥 아이인 줄 알았던 네가 생리를 하다니, 너의 변화를 축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울음이 왈칵 쏟아졌어.
우리가 시간을 함께 보낸 지난 여름, 나와 비슷한 시기에 너도 생리를 했어. 키는 나만큼이나 크고 발은 나보다 더 크지만, 행동과 말은 영락없는 아이인 너와 생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어.
“이모, 내 엉덩이 좀 봐줘요. 뭐 묻었어요?”
어느 날 보스턴에서 버스를 타고 가다 하버드 대학교 근처에서 내린 날이었어. 생리가 새는 느낌이 들었는지 너는 나에게 바지 뒤쪽을 봐달라고 했어.
“아니, 피가 샌 것 같지 않아. 걱정하지 마.”
허리를 굽혀 너의 바지 뒤쪽을 봐주며 괜찮다는 말을 건넬 때, 내가 네 나이였을 무렵 생리가 있었던 날들이 떠올랐어. 나는 여중, 여고를 다녔기에 학교에서 친구들과 생리에 대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어. 깜빡 잊고 생리대를 챙기지 않은 날 학교에서 생리가 터져도 걱정이 없었어. 친구 생리대를 내 것처럼 쓸 수 있었거든. 우리는 생리대를 갚을 생각도 없으면서 꼭 ‘생리대 하나 빌려줘.’라고 했어.
어린 시절 생리는 신체의 변화만 의미하지 않았어.
남자 선생님이 담당하는 수업이 있을 때나 학교 정문 밖을 나설 때 상황은 백팔십도 달랐어. 옆 반 친구 하나는 체육 시간에 쪼그려 앉아 운동장을 도는 기합을 받다가 생리가 샜다고 했어. 기합을 받는 게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뻘건 피가 묻은 체육복 바지를 입은 친구의 모습을 체육 선생님이 봤다고 생각하니 친구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어.
무더운 여름에 하는 생리는 최악이었어.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주변 사람들이 나의 생리혈 냄새를 맡게 될까 신경이 쓰여 입고 벗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꽉 끼는 거들을 입곤 했어. 통풍도 잘 안되는 교복 치마 때문에, 온 몸에 땀이 흐르는 한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화장실에 가서 생리대를 가는 건 생각보다 고단한 일이었어.
여자들만 복작거리던 중고등학교에서는 생리대를 치마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화장실을 다녔는데 남녀공학인 대학에서는 또 다른 상황이 펼쳐졌어. 학회실에 가방을 두고 생리대를 넣은 작은 파우치만 들고 화장실에 갈 때면 지나가는 남자 동기나 남자 선배들이 어디 가냐고 물어볼까 봐 괜히 신경이 쓰였어. 그땐 내가 생리 중이라는 것을 성(性)이 다른 인간은 모르는 일이길 바랐거든.
한 달에 한 번, 나의 몸과 마음이 백 점 만점에 몇 점인지 알 수 있었어.
생리를 하기 전 달콤한 초콜릿을 달고 사는 내 모습도, 생리 기간이면 극도로 예민해지는 내 모습도 모두 생경했어. 그즈음 여자 친구가 예민해지면 남자들이 ‘너 요즘 생리 기간이야?’라고 묻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어.
생리가 시작되면 왜 식욕이 왕성해지는지, 왜 롤러코스터라도 탄 듯 감정은 오르락 내리락 하는지 잘 몰랐기에 생리는 그저 안 하면 좋을 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자궁의 존재만 어렴풋이 느끼게 해줄 월례 행사일 뿐이었어.
직장 생활을 하며 일주일에 서너 번 새벽까지 야근하는 일이 잦았어. 생리가 불규칙해지고, 생리통이 심해졌어. 다음날까지 고객사에 전달해야 하는 월간 보고서를 쓰는데 허리는 끊어질 듯 아프니 허리를 곧추세우고 모니터를 가득 채운 파워포인트 화면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어. 지글지글 끓는 방바닥에 허리를 지지며 누워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달에 한 번은 꼭 했던 것 같아.
다행히 나의 여자 상사에게 생리통이 심해 조금 일찍 퇴근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나의 생리통을 이유로 고객사에 월간 보고서를 전달하는 날짜를 조정할 수는 없으니, 진통제를 입에 털어 넣으며 견뎠어.
재인아,
네가 생리팬티를 애벌빨래하는 모습을 보며, 자는 동안 생리가 샐까 봐 편안한 반바지가 아닌 몸에 착 달라붙는 거들 같은 바지를 챙겨 입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지난 시절을 소환했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생리를 하게 될 너를 딱하게 여겼어.
한 달에 한 번이라고 하지만 일주일에서 열흘 가까이 뜬금없이 찾아오는 입터짐과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을 관리해야 하고, 생리대를 미리 쟁여둬야 하고, 생리혈이 샐까 신경 써야 하고, 진통제도 구비해야 하는 일상을 유지하느라 피곤한 여자의 일상을 겪게 되겠지?
두 번째 출산 후 6년이 지난 지금, 내 자궁은 할 일을 끝냈다고 생각하곤 해. 매달 하는 생리가 멈추며 자궁이 은퇴하는 시점이 오면 몸과 마음이 그저 후련할까?
심장은 피를 혈관으로 내뿜고, 콩팥은 소변을 보관하다 배출하고, 폐는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데 내 자궁과 난소는 뭘 하며 지낼까? 더 이상 생리대를 살 필요도 없고, 이불과 바지에 생리혈이 새는 실수도 할 일 없고, 생리통도 사라지고 더 이상 아이도 낳을 수 없는 어느 때를 상상하다가 문득 이제 막 제 역할에 충실하기 시작한 너의 자궁을 떠올렸어.
그러고 보니 매달 난자 하나와 생리혈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기간 동안 불편과 고단함을 감내하며 내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 것 같았어. 남들은 매주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자신을 돌아보는데 난 피 묻은 생리대를 처리하며 나를 돌아봤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여기에 닿으니 곧 나에게 들이닥칠 폐경이 천천히 찾아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조금 더 가지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어.
그리고 앞으로 너랑 생리통이 생기진 않았는지, 생리컵과 생리팬티가 생리대보다 사용하기 수월한지, 자궁경부암 예방 접종은 맞았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난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생일날 산부인과에 가서 자궁 검사를 받았어. 자궁이 몸 어느 구석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 잡은 장기인지 확연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한 달에 한번 온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존재이기에 소중하게 돌봐주고 싶었어.
너의 스무 살 생일에 장미꽃 대신 산부인과 진료를 예약해 둘게. 너의 건강한 자궁과 쉬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찾아올 생리를 위해서 말이야.
앞으로 크나큰 애정으로 너의 몸과 마음을 다독여주기를 바라며, 500번 가까이해야 하기에 지난할 수 있는 생리 여정을 응원해.
너의 첫 번째 생리를 진심으로 축하해.
보스턴에서 이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