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또 생겼다. 얼마전 뱃속에 콩알이 자리 잡은 것을 알았다. 몇 주가 흐른 지금 입덧과 저하된 체력 탓에 고군분투 중이다. 임신 상태가 추가되었을 뿐, 일상에 큰 변화는 없다. 회사 다니고, 집안 살림 하고, 아이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같이 노는 건 꼭 같다.
한가지 변했구나. 나의 몸상태와 마음 가짐. 입덧과 체력 저하는 감정 상태에 영향을 미치고, 피곤함과 무기력함이 짜증을 유발한다. 짜증을 내는 행위 자체가 싫어 말을 아끼니 감정 표현이 원활하지 않아 새로운 스트레스가 쌓인다. 운동이라도 속시원하게 하면 좋을텐데 팔 한번 휘두르고 앉았다 일어서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회사는 일이 많다. 아침 저녁 책을 읽어낼 집중력이 상실된 터라 회사에서만이라도 집중하려 노력한다. 노력해서 안 될 일은 없지만 그만큼의 피로감을 선물로 돌려 받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은 늘 만원이라 앉을 자리를 못 얻으면 녹초가 되어 집에 다다른다. 배가 나오지 않은 임산부는 그저 딱한 처지를 감내해야 한다. 아이에게 책 두어권 읽어주고 나면 내가 먼저 꿈나라로 향한다. 아이와의 일상적인 기도 시간도 언젠가부터 사라졌다. 우리의 하루 마무리는 세상 아이들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기도였는데 이제 그 끝은 나 한몸 편안함을 원하고 있다.
며칠 전 냉장고를 열고 둘러보다가 혼자 울컥 했다. 김치 냄새에 속이 울렁거리고 입맛이 변한 탓에 밑반찬은 쳐다도 안 보고 살고 있다. 그 탓에 냉장고에는 사과 몇 개 굴러다니고 먹을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아이의 일상을 돌아봤다.
이제 네살된 아이가 최근 몇 주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까마득했다. 이모님이 해주시는 밥을 먹는 아이의 저녁 상을 함께 봐 줄 여유는 사치였다. (이건 임신과 관련없이 워킹맘에게 늘 사치스런 욕심이다.) 기껏해야 간식이라며 옥수수 몇 개 삶아둔 게 전부였다. 아이의 놀잇감이 테이블 위에 산을 만들어 쌓여 있어도 같이 정돈해 줄 시간이 없었다. (그 산을 이제서야 본 게 더 심각한 문제다.) 아이는 잘 웃고 노래도 곧잘 부르고 이야기도 조곤조곤 하면서 떼도 쓰고 고집도 부린다. 그럴때면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한 소리씩 했다.
"엄마 너무 피곤하니까 엄마 말 들어줘."
돌아보니 내가 아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주변을 뱅뱅 돌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전했다. 조금 일찍 퇴근한 남편이 아이를 앉혀두고 속삭였단다.
"엄마 아빠가 코딱지 떼쓰고 고집부릴 때 혼내서 미안해. 생각해보니 코딱지가 하고 싶은 게 있고, 뭔가 싫은 게 있어서 그랬는데 엄마 아빠가 하고 싶은 말만 한 것 같아. 미안해."
그랬더니 아이가 울먹이며 말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 때 아빠가 밥 먹을 때 돌아다니지 마라고 했는데 돌아다녀서 미안해요."
아이는 아빠가 왜 화를 냈었는지 맥락을 이해하고 있었고, 먹이사슬의 가장 아래에 있는 동물마냥 꾸짖음을 감당해내고 있었나보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늘 감추려고 아이는 애써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웃으려 노력했단다. 남편이 애써 웃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자 아이는 그제서야 아빠 품에서 펑펑 울었단다.
모든 인간에게 공감과 이해는 필요하다. 설령 세상을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나이와 처지일지라도, 삶을 유지하는 영역 내에서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과 마음을 나누는 행위는 살아가는 기쁨이자 삶의 원천이 된다.
이 어려운 것을 태어나 4년이 채 되지 않은 녀석이 몸으로 알려주었다. 부족함 많은 나에게 가르침을 주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