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2
2018년 6월 17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싱가포르에는 두 가지 종류의 날씨가 있다고 한다. ‘덥다’와 ‘더 덥다’. 지난 주는 무지막지하게 더웠다. 이번 주는 잠깐 쉬어가라는 듯 비가 자주 내린다. 며칠 전에는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밖에 나가 놀기를 체념한 큰 아이는 혼자 뒹굴 거리며 놀기 시작했다. 하늘을 찢는 듯한 천둥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작은 아이는 손발을 버둥거린다. 아이가 놀랄까싶어 얼른 안아 들었다. 윗집 베란다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똑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눈에 들어온다. 콘크리트 절벽에 잠깐 매달렸다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물방울들이 이쪽 저쪽에서 떨어진다. 마치 누군가 아주 열심히 두드리고 있는 피아노 건반을 몰래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름 체르니 40번까지 수학(?)했으니 건반누르는 재미가 쏠쏠한 피아노 연주곡이 한두 곡 있을 법도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곡 하나가 없다. 보면대에 악보를 올려두고 건반을 눌러본 지 15년이 흐르니 악보는 기억 속에 남아있지도 않다. (보면대라는 단어를 기억하는 자체가 더 신기하다.) 기약 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을 눈으로 좇아가다가 피아노 건반 위를 신들린 듯 움직이는 손가락을 상상했다. 생각이 흐르는 빗물처럼 흐르다 이 질문에서 멈춘다.
내가 피아노를 가장 즐겁게 쳤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중학교 1학년 때였다. 2학기가 시작할 무렵 음악 선생님이 2학기 실기시험 주제를 미리 알려줬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잘 한다고 생각하는 악기로 곡 하나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하굣길에 베프와 꽁꽁 언 하드 하나를 줄줄 빨아먹으며 음악 실기시험 악기로 뭘 할거냐는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도 나처럼 체르니 40번까지 피아노를 쳤다고 했다. 둘 다 피아노가 제일 만만한 처지였다. 피아노에 큰 흥미가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도전해 볼만한 다른 악기는 뭐가 있을 지 이야기를 나눴다. 단소는 늘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덕이듯 소리를 냈다. 리코더는 초딩때부터 했기에 시시해 보였다. 이 두 악기를 제외하니 트라이앵글, 캐스터네츠, 탬버린이 남았다. 우린 달리 방도가 없었고, 다시 피아노로 돌아왔다. 피아노를 좀 재미있게 쳐보고 싶었다. 하드를 다 먹어갈 무렵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피아노 앞에 둘이 나란히 앉아 네 손으로 연주하는 연탄곡! 서점에 들러 연탄곡집을 하나 사서 친구네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았다. 연주할 곡을 정하기 위해 악보를 넘겨가며 오른손으로 음표를 따라 건반을 짚었다. 너무 어렵지 않지만 건반을 두드리는 재미가 있는 곡이 필요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 곡, 가베트(L.Gobbacrts)라는 작곡가가 작곡한 '철도(Tramway)'였다.
동생이 줄줄이 딸린 나에 비해 언니 오빠가 있는 베프의 집은 늘 고요하고 안정적이었기에 친구 집에서 주로 피아노 연습을 했다. 피아노의 오른쪽에 내가 앉고 왼쪽에 친구가 앉았다. 친구 집은 작은 마당이 있는 양옥집이었다. 친구 방에서 거실을 바라보면 창 너머로 마당이 보였다. 거실과 마당 사이에는 대나무로 된 발이 늘 쳐져 있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다 잠깐씩 친구 손가락을 바라보고 거실을 지나 대나무 발을 거쳐 마당을 바라볼 때, 피아니스트가 된 듯 착각에 빠지곤 했다. 참 즐겁게 연습했다. 학교에 가서도 책상 위에서 건반을 치듯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콩쿠르라도 나가는 듯 주말 아침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신 건반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핀잔을 줬다. 피아노 학원 가라고 할 땐 가지도 않더니 가지 마라고 하니 연습한다고 난리라며 말이다.
실기시험 결과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전은 실전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 연발이었다. (아마추어는 실전보다 연습에서 더 좋은 결과를 얻는다.) 그 날 이후로 연탄곡집을 펼쳐본 적이 없다. 음대 피아노과에 도전하듯 연습했지만 결과가 안 좋았던 게 분명하다. 이십 년이 흐른 지금도 친구와 나란히 앉아 애써 건반을 눌렀던 그 날을 기억하는 걸 보면 어린 마음에 재미있고 즐겁고 유쾌한 순간들이었으리라.
건반을 어루만지는 네 개의 손이 한 곡을 완성해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교감이 주는 에너지가 얼마나 큰 지 실감하게 된다.
피아니스트 임동혁과 김정원이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을 연주하는 영상을 본 날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 어느 날이었다. 날씨 탓이었는지 내 마음의 문제였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그 영상을 보고 연주곡을 들었다. 추운 날씨 탓에 굳은 어깨를 피아노 선율이 감싸주듯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슈베르트의 <마왕>에서 느꼈던 무겁고 음침한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 시선이 연주자들의 표정에 다다를때면 궁금했다.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은 연주자들은 연습하는 내내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베프와 가베트의 ‘철도’를 연습하며 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실수를 하면 괜찮다며 토닥이고, 피아니스트인냥 폼 잡고 앉아 있는 서로를 보며 웃었듯 그들도 우리처럼 그랬을까? (이들은 피아니스트이니 폼 잡을 일은 없구나.)
건반을 어루만지는 네 개의 손이 한 곡을 완성해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교감이 주는 에너지가 얼마나 큰 지 실감하게 된다. 연주자마다 곡에 대한 감동 포인트가 다르고, 표현의 깊이와 범위가 다를 텐데 생각과 표현 방법이 다른 연주가 둘이 모여 앉아 하모니를 만들어내니 말이다. 우리가 가족을 비롯한 크고 작은 조직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게 연탄곡 연주자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서로의 방향과 속도를 이해하고 맞춰가기 위해 애쓰는 교감들 말이다. 너무 인간적인 요소 같아 회사와 같은 조직에서는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니 이 또한 없어서는 안 될 마음 한구석은 아닐까.
주말이 가까워지자 비는 온데간데 없고 ‘더 더운’ 싱가포르 날씨가 연일 강한 기운을 뽐내기 시작했다. 며칠 내내 비가 온 탓에 쌓여있는 빨랫감을 해결하는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데 큰 아이가 같이 놀자고 조른다. 기껏해야 네 식구 사는 집이지만 아이 어른 빨래 나누고, 수건이며 애들 손수건 나누고, 흰색 옷과 색깔 있는 옷을 나눠 빨기 시작하면 세탁기가 세상 최고로 분주해진다. 빨래도 중요한 일이지만 비 때문에 밖에서 신나게 뛰어놀지 못한 아이 마음도 헤아려줘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아이와 나의 ‘네 개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일상의 피아노 연주곡이 아니겠는가? 빨랫감 대충 정리해서 세탁기에 맡겨 놓고 집을 나선다. 햇살을 대하는 태도와 방향이 서로 다른 가족 간의 교감은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손놀림만큼이나 예민하고 감성적이다. 아이와 내가 일상에서 만들고 있는 '네 손을 위한 환상곡'은 어떤 박자와 리듬일까? 갑자기 그 소리가 궁금해진다.
음악 읽어주는 이>> 아멜리, 소소한 일상과 사람의 마음에 관심 많은 10년 차 마케터. 현재 남편 따라 싱가포르에서 체류중. 왈츠부터 덥스텝까지 모든 선율에 맞춰 춤추는 여섯 살 딸아이와 눈 맞추고 환하게 웃기 시작하는 14개월 된 사내아이의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