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닮은, 바흐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미뉴엣

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 3

by 아멜리 Amelie
The Best of Bach: Minuet in G, BWV Anh 114 | Tzvi Erez


2018년 6월 25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아이가 자전거를 사달라고 조른다. 어른이 뒤에서 밀어주는 유아용 자전거가 아니라 제 발로 페달을 밟아야 앞으로 나아가는 이른바 ‘진짜 자전거’. 자전거를 타는 친구를 본 적도 없고, 자전거에 얽힌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는데 하루 종일 사달라고 징징거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전거를 사야 하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아 시종일관 외면하고 무시한다. 동네 쇼핑몰에서 진열된 자전거를 만난다. 아이 허벅지에 아직 힘이 별로 없어서 잘 못 탈 거라 생각하고 한 번 타보라고 권한다. 페달을 스스로 밟아 앞으로 나가면 자전거 구입을 생각해보겠다고 부연 설명을 늘어놓는다. 아이는 끙끙거리며 자전거 안장에 오른다. 안 사줘도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겨워 보인다. 다행이다. 페달에 발을 올린 아이는 입으로 참았던 숨을 내쉬며 페달을 밟는다. 오랫동안 서 있었던 자전거는 아이의 주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아이는 머쓱하지만 아닌 척 하며 페달을 뒤로 휙휙 돌려본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풍선처럼 페달이 돌아가며 가벼운 바람소리가 난다. 아이는 제 입가에, 핸들을 잡고 있는 손가락 끝에, 페달 위에 나란히 얹어둔 발가락 끝에 힘을 준다. 자전거 바퀴가 지금 막 항구를 떠나는 배마냥 서서히 움직인다. 시작은 늘 힘이 든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니 아이는 언제 힘들었냐는 듯 쇼핑몰 자전거 코너를 잘도 돌아다닌다. 열 바퀴를 돌고 집에 가자고 하니 지금 당장 자전거를 사달라는 말로 응수한다. 스무 바퀴 타고 내일 사러 오자는 말에 이 자전거를 사면 된다는 말만 하고 페달을 밟아 도망간다. 서른 바퀴를 타고 좋은 자전거 알아보러 다니자는 말에 울고 불며 어찌할 도리 없이 땅을 밟는다.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의지와 바람만큼 명백한 명분이 또 있을까


그리하여 자전거를 샀다. 특별하지 않은 날 목적과 명분 없이 물건을 사는 게 습관이 될까 두려웠다. 시도 때도 없이 뭘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와 마주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살 이유가 없는 물건은 여태껏 사주지 않았다. 생일도, 새해도, 크리스마스도 아닌 때에 이제껏 샀던 장난감 중 제일 비싼 녀석을 샀다. 아이가 잠들고 베란다에 서 있는 자전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내 생각이 짧았다.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의지와 바람만큼 명백한 명분이 또 있을까. 두 손을 마주잡고 꼭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의 눈이 떠오른다. 이토록 간절하게,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꿈을 나는 최근에 가져본 적이 있었을까. 자전거를 사주면 무엇을 하겠다는 제안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마음만 토로했던 아이였다. 조건 없이 오롯이 그 하나만을 바란다는 순수한 소원이 또 있을까.

맑은 아이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아이는 아침 저녁으로 자전거 안장에 오른다. 마치 판사가 법복을 입을 때만큼 엄숙하게 헬멧과 무릎보호대, 팔꿈치 보호대를 제 스스로 챙겨 쓰고 입는다. 자전거 왼편에 아이가 서서 왼손으로 핸들을 잡고 오른발을 번쩍 들어 안장 너머로 몸의 절반을 보낸다. 곧이어 오른손도 핸들을 움켜 쥔다. 암벽등반이라도 하듯 엉덩이를 안장 위에 안착시킨다. 엉덩이를 살살 움직여 가장 편안한 곳으로 엉덩이의 위치를 조정한다. 페달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자동차 시동 거는 마음으로 페달을 거꾸로 돌린다. 가벼운 바람소리가 들리면 준비가 다 된 것을 직감하듯 앞을 내다본다. 짧은 호흡을 내뱉고 전진을 위해 페달에 힘을 싣는다. 허벅지 끝까지 힘이 들어가야 서있던 자전거의 바퀴가 움직이기에 엉덩이를 살짝 들고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바퀴가 한 바퀴 돌고 나면 아이는 다시 엉덩이를 살살 움직여 자세를 가다듬는다. 이제 달린다. 귓불을 스쳐 지나는 바람을 느낀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수영장에서 물고기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듯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자전거 안장 위에서 낮게 나는 나비와 잠자리가 된다. 공기를 거슬러 오르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재미와 걷는 행위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감을 만끽한다. 핸들을 꽉 잡은 손, 앞을 응시하는 눈, 자전거에 꼭 붙은 엉덩이, 페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허벅지, 아이는 자전거와 합체한 인간이다. 아주 정확하고 절도 있고 명쾌한 움직임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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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자전거 타는 몸동작은 바흐의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미뉴엣(Minuet in G major, BWV Anh. 114)을 닮았다. 아이가 자전거를 대하는 태도에서 연주자가 바흐 곡을 앞두고 악기를 대하는 자세가 느껴진다. 아이가 작고 여린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놓칠 수 없다고 다짐하듯 움켜쥔다. 연주자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한 음 한 음을 정성스레 만들어낸다. 한 눈 팔지 않고 앞을 바라보는 아이는 절제와 침착함으로 여정을 만들어 나간다. 바흐의 음계 여정 역시 어떤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깨끗하고 정제된 소리만 담고 있다. 연주자들의 들숨과 날숨마저 정수 장치를 거친 깨끗한 물처럼 순도 100% 열정이 깃들어 있는 듯 하다.


옹달샘에서 가장 깨끗한 첫 번째 물방울이 가슴 속에서 샘솟는 느낌이다.


바흐의 곡은 정확하고 명확하고 깨끗하다. 특히 무반주 첼로 또는 바이올린 곡을 듣고 있으면 옹달샘에서 가장 깨끗한 첫 번째 물방울이 가슴 속에서 샘솟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물이 너무 깨끗해서 물고기 한 마리 노닐지 못하는 그런 곳은 아니다. 오히려 음과 음 사이에 듣는 이의 마음과 생각을 담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다. 음악을 듣고 있는 느낌이 아닌 내 마음의 모든 불순물이 정화되어 깨끗하고 맑은 마음만 담아낸 음악이 바흐의 연주곡이 아닐까. 어른인 내가 하는 대부분의 생각을 거름망으로 걸러내면 순수하지 않고, 호도하고 곡해한 요소들이 찌꺼기처럼 묻어날 것이다. 아이의 생각은 체에 아무리 걸러도 미움, 원망, 후회, 미련 그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는 상태가 아닐까. 아이의 열망만큼 순수하게 꿈꾸기 위해, 오로지 하나를 향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를 헤치거나 미워하거나 이기려는 마음이 아닌 그저 사랑하는 마음만 간직하기 위해 나는 바흐의 음악 여정을 따라 나선다.


아이가 자전거를 더 잘 타게 되는 날을 기다리지 않는다. 자전거에 처음 오르던 그 날의 설렘과 기쁨과 즐거움만 기억해도 좋다. 나와 함께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미뉴엣을 듣다가 박자에 맞춰 춤을 추는 너의 그 마음 그대로 말이다.



음악 읽어주는 이>> 아멜리, 소소한 일상과 사람의 마음에 관심 많은 10년 차 마케터. 현재 남편 따라 싱가포르에서 체류중. 왈츠부터 덥스텝까지 모든 선율에 맞춰 춤추는 여섯 살 딸아이와 눈 맞추고 환하게 웃기 시작하는 14개월 된 사내아이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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