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5
2018년 7월 9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가끔 외롭다. 뜨거운 햇살이 무섭게 내리쬐는 오후가 지나가고 노오랗고 불그스름한 빛이 하늘을 수놓으며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시간이 오면 외로운 하루 무던히 잘 견뎠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해가 지는 하늘을 보고파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한 아이를 실은 유모차를 한 손으로 밀고, 한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오른손에 움켜쥐고 두 눈을 하늘로 보내고 저물어가는 하루의 끝자락을 향해 조금 걸어본다. 여기서 느끼는 외로움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결과 질감이다.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와 다른, 회사 동료들과 거나하게 술을 한잔하고 집에 와서 침대에 털썩 앉을 때와 또 다른 그리움이 섞인 외로움이다. 이 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고 길 위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마주친다. 그들의 저녁밥은 나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의 한 끼라는 게 느껴질 때, 귀를 기울여도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생소한 소리들이 귓가를 스칠 때, 익숙한 손짓과 몸짓이 아닌 몸으로 하는 생소한 표현을 만날 때 길 위의 우리 셋은 우주 전체에 달랑 우리 셋만 존재하는 것처럼 외롭다.
해 질 무렵 베란다로 뛰어나가 하늘을 바라보는 내 모습과 마주쳤던 어느 날이었다. 이 정도의 소소한 외로움은 따지고보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문득 인간은 언제 가장, 진심으로 외로울까 궁금했다.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죽는 그 순간 또는 죽고 나서 무한히 홀로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사무치게 외롭지 않을까.아직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상에만 존재하는 시간이다. 경험이 없기에 온몸과 마음을 다해 외롭지 않을까 상상해볼 수 있는 순간이다. 왜 죽음의 시간 언저리에 외로울 거라 생각했을까.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에 마주치는 이는 나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입으로 나누는 언어를 공유할 수 없고, 각자의 몸이 보여주는 표현이 다르니까…… 서로 통(通) 하지 못할 테니 외롭지 않을까.
이제 외롭지 말아요, 우리
가장 최근에 나의 마음과 몸으로 만난 죽음은 시할머니의 별세였다. 결혼을 하고 얼마 있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혼자 계시던 시할머니가 시부모님 댁에 오셔서 같이 살기 시작하셨다. 시댁 거실에는 할머니의 고정석이 있었는데 거기 앉으면 창밖으로 작은 정원이 딸린 베란다가 보인다. 할머니는 그곳에 앉아 좁다란 햇볕을 받으며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셨다. “무슨 생각하세요, 할머니?”라고 여쭤보고 싶었는데 한 번도 그 질문을 못했다. 나는 할머니의 몸을 늙음이 모두 뒤덮은 순간만 바라본 신참 가족이었기에 그 질문에 뒤따라 올 할머니의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굽은 어깨 위에 고요하게 내려앉은 햇빛을 보면서 속으로 질문을 하고 또 속으로 대답을 상상했다. 할머니의 어린시절 애틋했던 친구나 자매들과의 추억, 눈물 마를 날 없었던 시집살이, 자식들 키우며 고생했던 순간들, 할머니보다 먼저 간 이들에 대한 그리움까지. 그날 할머니의 어깨는 참으로 외로워 보였다.
할머니가 넘어져 다치시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가을이 찾아온 어느 날 혼자 병문안을 갔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고 계셨는데 그날따라 보청기를 껴도 내 이야기를 잘 못 알아 들으셨다. 따뜻한 무언가를 전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너무 얇아서 주무를 것도 없는 다리였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내 손바닥에 묻어 있는 온기를 할머니의 마른 핏줄에, 얇은 피부에 가늘게 숨 쉬는 근육에 전해드리듯 할머니의 다리와 팔을 어루만졌다. 외로워 보였던 할머니의 모습이 기억났다. 온기, 한 인간의 몸에서 따뜻한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순간이 죽음이 아닐까 싶은 찰나였다. 할머니의 몸에 내 온기를 조금 나눠 드리고 싶었다. 비록 할머니와 내가 서로를 다 알지 못하고, 그 순간 편안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서로 희미하게 주고받은 웃음의 의미를 할머니가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할머니의 몸 한구석이 조금 따뜻하고 편안해지길 바라며 할머니의 몸을 만져보았다. 할머니는 얼라(아기) 잘 키우라며 가느다랗고 새하얀 손을 흔들어주셨다. 봄이 오기 전 동장군이 가장 기승을 부리던 날 할머니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사진 속 할머니를 보고 절을 올리며 '할머니, 이제 외롭지 말아요.'라고 귓속말하듯 읊조렸다.
그렇게 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고향에 갈 때마다 우리 할매(할머니)를 만나면 할매 몸을 어루만지다 못해 손바닥이 뜨끈해질 때까지 문지른다. 둥근 해가 떠오르는 산등성이처럼 굽어 있는 등과 쭈글쭈글해서 수분팩을 수천 장 써도 펴지지 않을 것처럼 주름이 가득한 얼굴, 나무 인형 피노키오처럼 마디마디를 연결해 놓은 듯 앙상한 손가락 구석구석에 나의 뜨듯한 체온이 전해지길 바라며 말이다. 할머니의 인생 후반전을 눈으로 지켜보고 함께 했던 한 인간으로서 나날이 온기가 줄어드는 할머니가 외로워 보이는 게 싫었는지도 모른다. 수두에 걸린 어린 손녀의 등을 밤새 손끝으로 하염없이 쓰다듬어 줬던 그때 당신의 모습과 똥도 안 아까운 손녀라며 칭찬해준 당신의 모습과 이제는 내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부터 흘리는 당신의 모습까지 모두 기억하는 손녀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체온을 나누는 일일지라도 인간의 손길이 닿은 곳에 마음의 꽃이 피어날 것을 알기에 연신 할매를 쓰다듬을 수밖에 없다.
조성진이 연주한 드뷔시의 달빛(Debussy 'Claire de lune')을 들었던 그날 밤, 조금 외로웠던 모양이다. 한참 동안 듣다가 잠을 청하려 몸을 뉠 때 아이의 작고 여린 발이 보였다. 종종걸음으로 하루 온종일 뛰어다닌 아이의 발을 쓰다듬어 주고 포도알 만지듯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아이가 발로 느꼈던 하루를 내 손바닥으로 느끼면서 금세 손이 따뜻해지더니 이내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외롭다던 헛헛한 느낌도 뙤약볕에 물기 마르듯 사라졌다. 그 후로 드뷔시의 달빛을 들을 때면, 인간의 몸과 몸이 닿아 온기를 주고받으며 외로움을 녹인 그날밤이 떠오른다.
지금 이 순간 사무치게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드뷔시의 달빛을 비지엠으로 곁에 있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보는 건 어떨까. 그리하여 한 인간의 온기가 외로움이 주는 눅진한 마음을 조금 말릴 수 있도록 말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은은하게 한 줄기 따스함을 전하는 달빛의 위로를 건네는 의미로 드뷔시가 이 곡의 제목을 달빛이라 지었다고 상상(?)하며 듣다 보면 외로움에 허덕이는 마음을 조금 더 건져올릴 수도 있을 만큼 참 따뜻한 곡이다. 다시 생각해보니 온기를 느끼게끔 해주는 건 인간일 수도 있고 동행하는 동물일 수도 있겠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이 곧 위로를 줄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머리보다 마음이 가는 대로 말을 하는 아이와 이제 막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내기 시작한 아이와 함께 하루를 꽉 채웠다. 말을 주고 받으면 통하는 듯하지만 통하기가 쉽지 않은 아이들과 시간을 채워나가기 위해서는 따뜻한 몸이 필요하다. 안아주고, 쓰다듬어주고, 보듬어주는 나의 손길과 나의 품에 제 스스로 안기고, 다가와 지그시 기대고, 어루만져 주는 아이의 손길이 얽히고 설키며 우리 모두를 덜 외롭게 만든다. 인간은 어쩔 수없이 외롭다고 하나, 그 외로움을 어루만져 주는 열쇠도 인간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