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목소리만큼 매력적인 악기가 또 있을까.

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11

by 아멜리 Amelie
Thomas Quasthoff; "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 Gustav Mahler


2018년 8월 28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둘째 아이를 낳기 한 달 전이었던 작년 12월, 싱가포르로 보낼 짐 정리와 갓난아이 맞이 준비를 도와주러 대구에 사는 친정엄마가 서울에 얼마 동안 와 계셨다. 큰아이를 동네 어린이집에 보내고 본격적으로 살림살이를 정리하기 전, 몸과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시간이 잠깐 있었다. 물을 끓이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티포트에 보이자 잎을 던져 놓고 따뜻한 물을 붓는다. 맨 처음 우려낸 찻물은 과감하게 버리고 다시 따뜻한 물을 부어두고 기다린다. 이 시간을 오매불망 기다린 모녀는 보이차를 찻잔 가득 따르고 나란히 식탁에 앉았다. 따뜻한 보이차를 호로록 마시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졌다. 비싸고 좋은 찻잎도 아니고, 맛을 가미하는 뭔가를 넣지도 않았지만 차는 달디 달았다. 잠깐이지만 아이와 집안일에서 해방되는 시간은 세상을 달콤하게 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선물로 안겨주었으리라.


식탁에 앉아 뭘 먹거나 마실 때에는 꼭 그에 어울리는 노래나 음악을 들어야 하므로 그날도 어김없이 선곡에 돌입했다. 여름께에 나훈아(나훈아 아저씨는 ‘나훈아’라 해야 어울리므로 존칭을 생략하고자 한다)의 새 앨범이 나온 게 떠올랐다. (아이를 낳기 전 음악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에 국내 가수들의 앨범 출시일 하나는 꿰고 있었다.) 11년 만에 마이크를 잡는다는 나훈아의 새 앨범 제목은 ‘드림 어게인(Dream Again)’ 이었다. (앨범 제목마저 나훈아만큼 멋있다고 생각했다) 앨범에 수록된 곡의 제목을 엄마에게 들려주며 마음에 드는 제목 하나를 골라보라고 했다. 남자의 인생, 몰라, 당신아, 아이라예, 죽는 시늉, 모래시계, 내 청춘…


엄마는 '아니라예'를 듣자고 했다. 노래를 틀자마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반도네온 소리가 먼저 흘렀기 때문이다. 탱고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소중한 악기 소리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니! 노래에 대한 나의 호감이 한층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나훈아의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그렸던 그 목소리다. 나훈아는 비주얼과 비슷한 듯 비슷하지 않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부드러우면서 힘이 있고, 간들거리지만 가볍지 않다. 나훈아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가 노래에 묻어났다. 게다가 ‘아니라예’는 가사까지 사투리여서 특유의 음색이 더 느껴졌다.


이 노래를 들으며 나눴던 대화를 재현해본다.


나: 엄마, 엄마는 나훈아가 좋나, 남진이 좋나?
엄마: 그거는 짬뽕이 좋나 짜장면이 좋나 이래 묻는 거랑 같지. 짬뽕을 먹으면 짜장면이 먹고 싶고, 짜장면을 먹으면 짬뽕이 먹고 싶잖아.
나: 나는 나훈아가 좋다.
엄마: 왜?
나: 나훈아는 잡초 같고 남성적이어서 멋있고, 남진은 좀 뺀질 하게 노는 오빠야 같아서 가벼워 보여.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 잠깐 노래 감상에 몰입했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엄마가 말했다.


엄마: 아이라예는 아닙니다라는 경상도 사투리다. 니 아나.

나: 엄마, 내 경상도 사람이다. 갑자기 와카노.


‘아니라예’만 몇 번을 더 부르고 살림살이 정리에 돌입했다. 지금도 엄마를 생각하면 나훈아의 ‘아니라예’가 떠오르고, 나훈아의 목소리가 떠오르면 엄마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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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둘째 아이와 오롯이 단둘이 머무는 시간이 있다. 졸린 녀석이 잠을 쉽게 청하지 못하는 날은 두 시간 내내 자장가만 부른다.(요즘 내가 미는 자장가는 ‘섬집아기’가 아닌 ‘‘고향의 봄’이다.) 잘 생각이 전혀 없는 날은 날씨에 따라 선곡이 달라진다. 비가 오면 가사에 비가 나오는 노래를 찾아 부른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가끔은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도 불러준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또 가끔은 비틀즈의 ‘헤이 주드’를 부르기도 한다. 해가 쨍쨍 나는 날에는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부른다. 율동이 가미된 노래가 필요한 순간에는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꼬물대다 뒷다리가 쑥 앞다리가 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를 부른다. 첫째 아이가 합류하는 오후 시간이 되면 선곡은 더욱 다채로워지며 밤을 지새워도 다 못 다 부를 노래의 향연이 펼쳐진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TV로 MBC 창작동요제를 보면서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꿈을 꾸곤 했다. 내가 직접 지은 노래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부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했다. 동요제 참가 꿈만 꾸다가 중학교를 갔다. 미술 갤러리를 다녀오는 방학 숙제가 있어서 시내에 있는 백화점 갤러리를 갔다. 백화점 방문객을 대상으로 노래자랑이 있다기에 현장에서 바로 참가했다. 김수희의 남행열차를 불러 1등을 차지했고, 상품으로 가족사진 촬영권을 받았다. 이때 처음으로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찍기 전날 부부싸움으로 인해 엄마 아빠는 어색하게 손을 잡고 입술에 경련이 올 정도로 억지웃음을 지었으며, 액자 사이즈를 업그레이드하느라 아빠는 생각지 않았던 지출을 해야만 했다. 고등학교 때 중창단 서클에 가입하며 테스트 곡으로 ‘목련화’를 불렀다. 음악 선생님이 소리가 좋다며 성악을 해보라고 권했다. 오랜만에 가족이 아닌 누군가가 뭘 해보라고 권하기에 귀가 솔깃해서 며칠 동안 혼자 성악 학원을 알아봤다. 학원비는 너무 비싸 보였고, 3일 고민 끝에 그냥 공부해서 대학 가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대학에 가서 대학가요제에 꼭 나가겠다는 꿈을 꿨다. 대학에 와서 놀기 바쁜 나머지 노래는 노래방에서만 불렀다. 그러다 우연히 프랑스어 교육 기관인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매년 샹송 경연 대회가 열리는 것을 보고 녹음테이프를 보냈고 예선을 통과했다. 지역 1차 본선은 부산에서 열렸는데 한껏 격앙된 마음을 안고 부산으로 달려갔으나 고음이 그만큼 속 시원하게 나오지 않아 그 자리에서 탈락의 쓰라림을 맛보았고 대신 해운대의 밤을 즐겼다.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복잡하고, 매사가 다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좋은 목소리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누가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과 꼭 같은 치유의 힘을 얻을 수 있다. 만인이 들어도 다 좋아하는 가사와 멜로디를 가지고 있는 노래가 있더라도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감동은 하늘과 땅 차이다. 노래 좀 부른다는 친구가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와 하늘이 내려준 목소리를 가진 가수가 부르는 노래가 같을 수 없고, 감동의 깊이와 넓이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성악가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목소리만 듣고 그의 작은 체구를 상상할 수 없었다. 오히려 독일인이기에 으레 190cm가 넘는 거구를 상상했다. 장애를 가진 작은 몸으로 성악을 하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성악가가 재즈를 부른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성악곡이든 재즈곡이든 그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창문을 넘어온 피터팬과 팅커벨을 만나 깜짝 놀라고 있는 동안 팅커벨이 뿌려주는 마술 가루 덕분에 몸이 바닥에서 붕 떠오르고 피터팬이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깜깜한 밤하늘을 여행하는 느낌. 한참을 날으며 여행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면서 그 감동을 잊지 못하는 심장이 두근거려 쉽게 잠을 청하기 어려운 날을 만난 것처럼 그의 목소리에 깊게 빠지게 된다. 인간의 몸 구석구석이 모두 아름답고 경이롭지만 그중에서 목소리가 주는 안도와 위로의 크기가 얼마나 크고, 깊은 지 알고 싶다면 꼭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목소리를 들어봐야 한다.


그가 부르는 재즈곡도 잊지 않고 들어보자. 같은 사람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지만 감동은 변함없이 한꺼번에 와락 몰려든다.


Thomas Quasthoff - Georgia on my mind


오늘은 신선한 바람이 부는 ‘찌는 듯한’ 여름이었다.(싱가포르는 사시사철 한결같이 덥다) 바람이 불어와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떠올랐고, 가사를 주섬주섬 떠올리며 떠듬떠듬 불렀다. 곁에 앉아 노래를 같이 듣고 있던 큰아이가 말을 건다.


엄마, 눈을 이렇게 감고 상상해봐.
막 바람이 얼굴에 불어와.
나뭇가지도 막 얼굴에 부딪혀.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지지, 엄마?


가사를 검색해 물끄러미 바라봤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으로 간다는 이 노래는 오늘 누군가가 바람결에 나에게 보낸 위로의 메시지 같았다. 이렇게 또 한 번 노래로 위로를 얻는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있네

설렘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볼 하늘과 사람들

힘겨운 날들도 있지만 새로운 꿈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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