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하늘에 닿길 바랄 때, 슈베르트 아베 마리아

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12

by 아멜리 Amelie
Ave Maria - Luciano Pavarotti

2018년 9월 4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하루 온종일 아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90분 내내 쉴 틈 없이 뛰어야 하는 축구 주전 선수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나의 하루는 축구 경기처럼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전은 ‘잘 잤어?’로 아침 인사를 하며 눈 비비고 일어나 먹고, 씻고, 큰아이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 밥 챙겨 먹고 간단한 집안일을 하거나 둘째와 놀아주는 시간까지이다. 전반전을 잘 뛰는 전략은 딱 하나인데, 바로 아이들의 ‘오늘의 마음’을 결정해주는 것! ‘오늘의 마음’이란 말은 내가 지어낸 말인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작은 아이를 보고 웃음을 짓고 있거나, 작은 아이 젖을 주고 있으면 큰아이의 ‘오늘의 마음’에 바로 스크래치가 난다. 동생의 등장으로 다소 예민해진 큰아이를 위해 눈을 뜨면 곧바로 큰아이의 눈곱 낀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잘 잤어?’ 이로써 아이의 감정을 활발, 유쾌, 즐거움의 영역에 안착시킬 수 있다. 가끔 나도 모르게 둘째 아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시작하는 날이 있다. 이런 날은 어김없이 이불 위에서 벌어지는 큰아이의 생떼 쓰기와 거친 몸부림 탓에 아이의 마음은 우울, 불안, 소외감의 세계로 빠지게 되고, 우리는 피파랭킹 1위를 만난 정도의 힘겨운 경기를 치러야 한다. 하.루.내.내.


후반전은 유치원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를 데리러 가는 일부터 시작되는데, 경기량이 상당하다. 경기장에서 공격수, 심지어 골키퍼까지 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집에 도착해 씻기고 먹이고 놀아주고 이야기 나누고 정리하고 밥 준비하고 밥 먹고 또 씻겨서 잘 준비하고 책 읽고 꿈나라로 보내고 남은 집안일하고 부엌 불을 ‘딸깍’ 소리를 내며 끄고 나와야(헥헥) 하루에 끝이 보인다. 후반전을 잘 이어나가는 전략도 딱 하나다. 체력, 바로 나의 체력이다. 둘째가 낮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날은 하염없이 안아줄 수 있는 체력, 첫째가 자전거를 타고 놀고 싶어 할 때 유모차와 자전거를 동시에 밀고 끌며 지치지 않고 집까지 무사히 올 수 있는 체력, 아이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큰소리 내지 않고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체력(과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어쩌면 나의 ‘오늘의 마음’ 관리는 체력 관리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IMG_0042.jpg 유치원을 오가는 길 위에서 만나는 세상은 어마어마하다.


그날도 어김없이 후반전을 알리는 휘슬 소리에 맞춰 큰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다. 친구들과 굿바이를 수백 번은 더 외치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치원 바로 앞에 사거리가 있고 대각선 방향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는데 아이들은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내내 종알거리고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기에 횡단보도 위에서 아이 손을 더 꼭 잡게 된다. 두 번째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바로 옆에서 ‘뻥’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할머니와 원복을 입은 아이가 길에 쓰러져 있고 급정거한 택시 한 대가 출렁이고 있었다. 횡단보도 한가운데 멈춰 서서 큰아이의 눈을 가려 그 광경을 못 보게 했다. 교통사고 현장을 가까이에서 본 게 거의 처음이라 횡단보도 한가운데서 그만 얼어버렸다. 사람들이 어서 돌아오든지 가든지 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제서야 사태 파악이 되었고, 함께 이 광경을 보던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에게 구급차를 부를 수 있는 긴급 번호를 알려달라 해 사고를 접수했다. 사고가 난 곳을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차에 부딪혀 쓰러졌었던 할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간다고 하는 게 아닌가. 현장에 있던 엄마들과 함께 병원에 먼저 가야 한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할머니는 괜찮다며 집에 간다고 했다. 한참 동안 그 할머니와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할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버렸다. 사고를 낸 택시기사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어떻게 해야 하냐며 나를 비롯한 아이들 보호자에게 따지듯 물어봤다. 다른 아이들의 보호자들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사고를 낸 택시도 그 자리를 떠났다. 나와 우리 아이들과 큰아이와 같은 반 친구와 그의 아빠만 덩그러니 사거리에 남게 되었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구급차가 보였고 길 위에는 사고의 흔적이 단 하나도 없었기에 사고 신고를 한 나에게 전화가 왔다. 다친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는 설명과 함께 또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을 정리해서 알려줬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탓에 너무 무서워서 집으로 바로 가기가 힘들어 동네 쇼핑몰에 가서 한동안 배회했다. 쇼핑몰에 가는 길에 경찰에서도 전화가 왔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본 그대로 설명했다. 곧이어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도 연락이 왔고, 테이프 돌리듯 반복해서 상황을 전달했다.


왜 나는 사고를 목격하고 제일 먼저 구급차를 부르고, 사고를 당한 할머니에게 병원에 가야 한다고 설득하고, 사고 현장에서 제일 늦게까지 남아있으면서 사고를 낸 택시 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구급대원, 경찰, 유치원 선생님과 차례로 전화까지 하며 상황을 알렸을까?


나중에 혹시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처럼 꼭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작동했다. 마치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기도에 대한 개똥철학을 하나 가지고 있다. 나의 기도가 하늘에 닿아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대상이 ‘나’가 아닌 ‘남’이어야 한다는 것. (천주교 신자이긴 하나 크리스마스가 아니면 성당조차 가지 않는 나일론 신자이기에 기도에 대한 개똥철학임을 분명히 한다.) 나의 안녕과 성공, 부귀영화를 위해 기도라는 화살을 쏘아놓고 그 화살이 크나큰 복주머니를 달고 돌아와 주기를 바랄 때, 나는 민낯이 발개지고 이내 부끄러워진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몸과 마음의 건강과 평화, 정신적 물질적 여유라는 크나큰 복주머니가 소리 없이 날아가게끔 빌어줄 때, 비로소 하늘에 계신 누군가가 내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여주지 않을까. 기도가 나를 위한 속삭임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외침일 때 하늘에 가닿을 수 있는 힘이 마음에 더해질 거라 믿는다.


가끔은 민망하더라도 기도 속에 ‘나’를 집어넣고 싶을 때가 있다. 나도 평화로워지고 싶고, 나도 재물에 욕심이 나고, 나도 조금 더 괜찮은 미래를 갖고 싶을 때 말이다. 이럴 때 덜 부끄러워지는 기도법이 있다. 나를 포함한 ‘우리’를 위한 기도를 하면 된다. 우리 모두 평화롭게 살고, 우리 모두 조금씩 더 가질 수 있는 있고, 우리 모두 조금 성장한 미래를 갖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럼 남도 좋고 나도 좋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좋아질 수 있다.



가끔 두 녀석이 아프거나 마음에 상처를 받고 힘들어할 때, 우리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미안해질 때가 있다. 우리 아이들보다 더 아픈 여린 생명이 떠오르거나, 더 힘겹게 살아나가려 애쓰는 아이들의 모습이 생각나면 우리 애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어서 나부터 응석 부리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도 세상 아이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도 꼭 한 가지다. 우리 모두의, 세상 모든 아이들을 이해 기도하는 것.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 같이 손 맞잡고 기도를 했다. 아이가 먼저 자버린 날은 아이의 가슴에 손을 얹어두고 콩 딱이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기도를 한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엄마 아빠한테 맞지 않고

총알이 날아들지 않는 밤을 보낼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을 보살펴주세요


IMG_9772.jpg 이 녀석은 유모차에서 잠들 때 기도를 자주 한다. 이 녀석의 기도 내용이 제일 궁금하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악을 들을 때가 있다. 기도가 필요해서 음악을 들을 때도 있고, 음악을 듣다 보니 기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Ave Maria)는 그 모든 상황에 꼭 들어맞는다. 그래서 누군가 하늘을 향해 외치는 기도를 몰래 듣고 있는 느낌이 든다. 아베마리아를 듣고 있으면 몸의 구석구석이 편안해지다가 이내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된다. 마치 불현듯 눈앞에 성스러운 존재가 나타나 내 작고 여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었으니 이야기를 해보라고 속삭이는 말처럼 노래가 들린다. 마음에 거칠고 잔인한 파도가 일렁이고, 폭우 속에 우산 하나 쓰고 덩그러니 혼자 걷고 있을 때, 한쪽 어깨 내밀며 기대어도 좋다고 말하는 이가 보이지 않을 때면 아베마리아를 들으며 다소곳해지고 싶다. 손을 모아 무릎 위에 포개고 앉아 하늘 한구석을 응시하며 내 삶을 조금 보드랍게 감싸달라고 고요히 기도를 읊조린다.

갑자기 사람들의 기도 내용이 궁금해진다. 다들 무얼 위해 기도를 하고 있을까? 나를 위한 복주머니를 내려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내가 아닌 누군가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까. 세상 모든 이들의 기도가 나만을 위한 노래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목소리면 좋겠다. 온 지구와 지구인들이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얼마 전 내 기도를 듣던 아이가 물어본다.


“엄마, 왜 총알이 날아드는 밤을 보내는 아이들이 있어?”


“어른들이 서로 자기들 욕심에 무시무시한 총칼로 서로를 아프게 하는 곳이 있어. 그런데 어른들도 다치지만 아무런 죄도 없는 힘없고 나약한 아이들도 아프게 되거나 영원히 안녕하며 세상을 떠나. 그래서 그곳에 사는 아이들이 모두 무사하게 다치지 않는 밤을 보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야.”


“아. 세상에 총알이 없어지면 좋겠어. 아기들이 안 아프게.”

아이의 대답 자체가 기도가 된 밤이었다.
낮이든 밤이든 우리 모두 무사하길 다시 한 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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