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의 힘

위로

스스로를 위로함

by 아멜리 Amelie

위로를 받고 싶을 땐 누구에게 위로를 청해야할 지 잘 생각해야한다. 위로 받으려고 이야기 보따리를 늘어놨는데 상대방 반응이 시원찮을 때가 있다. '아, 그렇구나'하고 끝내는 사람, '그건 약과야, 내 이야기 좀 들어봐'라며 자기 푸념 늘어놓는 사람, 제 일처럼 생각해 지나칠 정도로 훈수를 두는 사람도 꼭 있다.


작년 7월 말, 밸리락 페스티벌 프로젝트 현장 운영을 4일 마치고 돌아온 직후였다. 몸이 뭔가 이상하고 어색해 머리에 떠오르는 그것을 확인했다. 임신이었다. 현장에서 고생한 후배들에게 우린 7명이 아니라 8명이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락페를 즐긴 아이니 태명은 '락큐'라 지었다. 땀으로 샤워를 해도 될 정도로 더웠던 7월 말 여름, 락페 현장에서 후배들은 커피와 물 외에 아무것도 안 먹겠다고 손사래를 쳤고, 난 혼자 1일 1 떡볶이를 해치우며 아줌마라서 식욕이 남다른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임신 출산 유경험자답게 여유를 부리며 여름이 클라이막스를 그리는 8월엔 촬영 현장을 따라갔다. 삼청동이라 가깝기도 했고 스텝이 고작 3명이라 뭐라도 할일을 해야했다. 촬영 시작 5분 전 화장실에서 레드와인을 쏟은 듯 붉디 붉은 피를 보고 화들짝 놀라 병원에 가야겠다며 후배에게 앞뒤 설명 없이 자리를 떴다. 이것저것 검사를 하던 의사 선생님은 이틀 후에 다시 오라고 했고 다시 갔더니 '아이고 갔네.'라며 허공에 연기처럼 둥둥 떠다니는 말을 남기셨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 말은 이틀동안 불안으로 똘똘 뭉친 내 마음의 잠금장치를 해제시켰고 두 번 만난 의사 앞에서 펑펑 울게 만들었다. 왠지 친한 사람들앞에선 덤덤하게 굴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었나보다.


한 동안 억울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둘째에 대해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허망하게 간 것같아 속상했다. 아이는 배가 불러오기 전까진 왔다는 소식을 알려준 그 자체로 행복인데 그것을 지키지 못해 미안했고 나에게 실망스럽기도 했다.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유산을 하고난 후 세상 모든 임산부와 신생아가 부러웠다. 그들이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얄미웠다. 길에서 지하철에서 임산부를 보는 게 싫었다. 이렇게 무차별적인 미움이 마음에서 샘솟은 것도 처음이고 이 마음을 다루는 게 쉽지 않았다. 이런 마음이 드는 자체가 스스로에게 민망하기도 하고 작고 못난 사람인 것을 책망하기도 했다.


동네 언니에게 몇 달 동안 미움으로 가득찬 마음 고생을 넋두리하듯 쏟아냈다. 언니는 웃으며 말했다.


"여자들이 참 히한하지. 다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옆에 여자 임신 하면 둘째 낳고 셋째 낳는거야. 이기려고 경쟁하듯이. 괜찮아. 그런 마음 들 수 있어. 엄마라서 그래."


언니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날 집에 돌아오며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괜찮아도 된다는, 나에게 이런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는, 나도 그저그런 인간이라는 안도감이 물감처럼 마음에 섞여서 보기에 편안한 색깔을 만들었다.


얼마 전 오랜 친구를 만나 비밀을 나누듯 배가 불러오는 세상 모든 여자들을 이유 없이 미워했던 나날을 이야기했다. 친구가 어깨를 툭 치며 솔직해서 좋다고 했다. 그 순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움도 하나의 감정이라면 나는 그간 솔직하게 그 감정과 대면하고 있었다고 안심했다.


인간이 만든 씨앗과 대지가 만나 만들어진 그 때의 수정란이 세상에 너무 빨리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게다. 그럼 난 또 새로운 우주를 맞이하느라 몸은 무거워도 마음은 민들레 홑씨마냥 가벼워서 봄바람을 닮은 웃음을 얼굴에 띄었을게다.


인간도 아니었던 작은 씨앗이 내 몸에 왔다 떠난 옛 기억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나 스스로를 위로해주고 싶고 작디 작은 우주였던 씨앗을 멀리 멀리 보내주고 싶어서다.


작디 작은 우주가 만나려했던 봄이 온다. 엄마인 나는 봄을 만나고 아이였던 너는 이 봄에 없다는 것에 뜨거운 후라이팬에 살짝 손가락을 데인듯 화들짝 놀라며 작은 한숨을 짓는다. 세상 인연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다음에 봄이 올 때 너가 다시 내 뱃속에 찾아와주면 좋겠다. 봄에 태어난 나와 봄에 태어날 너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운 겨울을 보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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