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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의 힘

할머니 편지, 하나

김늠이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by 아멜리 Amelie

할머니 안녕, 보민이에요.


할머니를 보고 온 후로 할머니 생각만 해. 할머니가 아픈 것도 슬프고, 누워만 있어서 더 가슴이 아팠어. 휠체어에 앉게 해서 밀어드리고 싶었는데 간호사가 주사 바늘 빠지면 할머니 힘들어진다고 해서 혹시나 할머니가 더 많이 아플까 봐 그러질 못 했어. 할머니한테 7월 여름 나무랑 하늘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콧구멍에 훅 들어오는 여름 공기도 맞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 생각해보니 누워있는 할머니를 처음 본 것 같아. 늘 부지런히 움직이는 우리 할머니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어색했어. 굽은 어깨가 무거운 듯 싱크대에 기대고 달그락 거리며 뭔가 끓이는 모습이나 개다리소반 옆에 옹송거리고 앉아서 무릎을 탁 치며 웃던 할머니 모습만 떠올렸는데 내가 본 할머니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어. 땅바닥에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 마냥 할머니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을 거라고 상상을 못 했어.


할머니,

내가 나이를 먹으면 능력치가 대단한 사람이 될 줄 알았어. 어떨 때 가끔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어. 그런데 싱가포르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한참을 생각해보니 내가 할머니한테 해 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어. 며칠 전에 할머니 만나서 등허리 쓰다듬어주고 팔다리 주물러 준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더라. 게다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것 마저도 자주 못 해 드려. 내가 할머니한테 지금 당장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어.


할머니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글 쓰는 걸 참 좋아해. 그리고 가끔 글 잘 쓴다는 칭찬도 들어. 내가 국민학생 때 할머니가 파동에서 막창집 할 때, 할아버지가 사람 키높이 되는 간판 손보다가 땅바닥에 떨어져서 다리 다쳤었잖아. 그때 할아버지가 깁스를 해서 한참 동안 할아버지 오토바이가 뽀얀 먼지 뒤집어쓰고 오도카니 서 있었거든. 그 이야기로 글을 지어서 학교 글짓기 대회에 제출했어. 그때 우리 학년 중에 제일 잘한 학생으로 뽑혀서 상도 받았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고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 모습 옆에서 이야기하듯 전해주고 싶어서 편지 써. 할머니 내 꿈은 작가야. 글 잘 써서 책도 내고 싶은데 언제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계속 조금씩 노력해서 꼭 책도 내고 ‘작가님’ 소리도 들어볼게. 꼭.


할머니,

나 결혼한다고 함 들어온 날 기억나? 그때 우리 다 같이 모여 앉아서 이야기도 엄청 많이 하고 돌아가면서 노래도 불렀잖아. 그때 할머니가 할머니 노래 부를 차례가 되니까 숟가락 하나 들고 일어서서 <고장 난 벽시계> 불렀어. 찾아보니까 나훈아가 불렀더라. 나는 남진보다 나훈아를 더 좋아해.


세월아 너는 어찌 돌아도 보지 않느냐 나를 속인 사람보다 니가 더욱 야속하더라

한 두 번 사랑 때문에 울고났더니 저만 큼 가버린 세월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청춘아 너는 어찌 모른 척하고 있느냐 나를 버린 사람보다 니가 더욱 무정하더라

뜬 구름 쫓아가다 돌아봤더니 어느새 흘러 간 청춘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우리 그날 다들 반주도 없이 젓가락으로 박자 맞춰가며 손바닥에 불날 때까지 손뼉 치면서 노래 불렀잖아. 나는 노처녀라 생각도 안 했는데 온 식구가 한마음으로 노처녀 하나 시집보낸다고 좋아한 것 같더라. 그때 다들 자기 이야기하느라 정신없고, 시끌벅적한 잔칫집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을 때, 할머니가 ‘내 함 지끼께’라고 말했어. 할머니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내 함 지끼께’ 그랬는데 임서방은 ‘왜 할머니가 함을 지킬까’ 생각했대. 그래서 지금도 우리 집에서는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내 함 지끼께’라고 말해.


할머니,

나는 늘 할머니랑 이야기하는 게 좋았어. 내가 학교에서 뭘 했다는 이야기만 해도 할머니는 박수를 치고 온 얼굴이 환해지며 웃었어. 그리고 그런 것도 할 수 있냐며, 잘했다고 칭찬해줬어. 별 대수롭지 않은 일도 할머니한테 이야기를 하면 모두 엄청 대단한 일을 해낸 듯 칭찬을 받았어. 할머니가 동네 사람한테 나 소개해줄 때 늘 그렇게 소개해줬잖아. ‘야는 똥도 아까운 아라요.’ 그런데 이렇게 할머니가 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정말 똥도 아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럴 때마다 정말 똥도 아까운 사람이 되어서 잘 살고 싶다고 다짐했어. 전교 1등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럴듯한 직장에 취직해서 잘 나가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할머니가 늘 잘한다고 해줘서 고마웠어. 누가 나를 온전히 믿어주는 마음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시간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가 말했던 ‘야는 똥도 아까운 아라요’를 떠올리며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했었어.


할머니 목소리는 둥글둥글한 조약돌을 닮았어. 할머니가 할아버지랑 싸운다고 큰소리를 내어도, 할머니가 동네 아줌마한테 손자들이 집에 놀러 왔다고 이야기할 때에도, 우리가 할머니 집에서 실컷 놀고 집에 갈 때 엄마 속 썩이지 말고 재지리 하지 마라고 이야기할 때에도, 할머니 목소리는 늘 둥글둥글했어. 그게 어떤 거냐면 모나고 뾰족한 사람 옆에 가면 내 마음도 그렇게 날카로워지는데 할머니 목소리 곁에 가면 나도 몽글몽글한 수제비 반죽처럼 되는 것처럼 편안해지는 거야. 내가 할머니 집에 들어가면서 ‘할머니’ 하고 부르면 할머니가 늘 그렇게 대답했잖아. ‘누구로, 보미가’ 내가 작년 어버이날에 전화해서 ‘할머니’하고 불렀을 때에도 할머니가 그랬어. ‘누구로, 보미가’라고. 아, 할머니가 나 불러주는 목소리 듣고 싶다. ‘누구로, 보미가’


할머니,

내가 앞으로 자주 편지 써서 보내줄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 모습 전해줄게.

할머니가 내 할머니여서 난 늘 좋아.


사랑해 할머니

보민이 드림

2019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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