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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의 힘

잘 가 할머니

김늠이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by 아멜리 Amelie

안녕, 할머니
나야, 보민이

할머니, 지금 우리 옆에 앉아서 우리 보고 있어요? 내일 먼길 가기 전까진 우리 옆에 있어주라. 마지막에 힘이 없어서 손 한번 못 잡아준 자식이나 손주 있으면 손도 한번 잡아보고, 머리도 한번 쓰다듬어주고 가주라. 내일이 추석이고 오랜만에 식구들이 모두 모였어. 오늘 이 자리가 할머니 손주 중에 하나 결혼하고 모이는 잔치 자리였으면 더없이 좋았을 텐데 할머니 멀리 보내드리는 자리야. 이 세상에 온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저 세상으로 간다고 하는데 막상 할머니가 그렇게 간다니까 속상하고 허망해.

할머니, 나는 추석 전날이면 떡집 문을 닫고 송편을 빚던 식구들의 늦은 저녁을 모두 기억해. 달짝지근한 송편소를 담은 그릇들, 빚은 송편을 찌던 큰 솥들, 주문 들어올 때마다 써 내려간 배달 장부도 기억해. 설날이면 가래떡을 빼던 할머니 모습도, 송편 빚던 큰아빠 모습도, 할아버지 배달 자전거를 탔던 아빠의 모습도, 내 이름을 늘 ‘보미’라 부르던 시장 사람들 모습도 모두 기억해. 할머니가 서부시장에 있을 때, 수두에 걸려 할머니 집에서 며칠 지내던 날이 있었는데 밤마다 손가락 끝으로 내 등을 긁어줬던 할머니 손길도 기억해.

할머니, 나는 추석이면 온 식구가 다 같이 떠나는 성묘길이 즐거웠어. 지영이 언니랑 나랑 홍이랑 새로 산 원피스 한벌씩 입고 시골길을 따라 산소에 가는 게 재밌었어. 주말이면 어느 개천 다리 밑에 돗자리 깔고 앉아 온 식구가 고기 구워 먹던 날들도 생각나. 내가 대학생이 되고도 명절이면 할머니 집에서 사흘 나흘을 같이 지냈잖아. 할머니랑 엄마, 큰엄마, 작은엄마랑 전 부치며 차례 음식 같이 준비하는 게 난 재밌었어. 남자들 욕도 하고, 웃긴 이야기 하면서 박장대소도 했던 시간이 좋았어. 어른들이 화투 치고 놀 때 옆에 앉아 용돈 받아가던 시간들도, 할머니 주방에서 뽀득뽀득 설거지하던 날들도 모두 그리워.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너무 가엽고 안쓰럽다 생각한 날들도 있었어. 할아버지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고, 떡집하고 식당일 하느라 분주했고, 아들이 넷 있지만 누구도 다정하지 않아서 할머니가 외로워 보일 때가 있었어. 그때마다 내가 더 크면 할머니한테 딸처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할머니 이야기도 많이 들어주고, 맛난 것도 사드리고, 좋은데 구경도 시켜 드리고 싶었어. 작년에 싱가포르로 이사 올 때 할머니 꼭 여기 놀러 오시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내가 약속을 못 지켰어.

할머니, 홍이 결혼하고 나서 서울 오셨을 때 우리 다 같이 파주에 놀러 갔잖아. 그때 아빠가 할머니 사진 찍었는데 자연스럽게 잘 나왔다며 이 사진 영정사진으로 쓰자는 이야기도 했었잖아. 진짜 그런 날이 왔어. 그날 사진 속 할머니가 여기 꽃장식에 쌓여 사람들이 전하는 마지막 인사를 듣는 날이 왔어.

할머니, 이제 명절이면 할머니가 해주던 식혜도, 단술도 먹을 수 없어. ‘누구로’하고 나지막이 부르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어. 손뼉을 치면서 ‘아고야꼬나’ 하던 할머니의 웃음도 볼 수 없어. 추석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할머니 생각할게. 할머니 추억할게. 그리고 좋은 곳에서 편히 계시도록 기도할게. 거기서 어린 시절 함께 보낸 부모 형제 동무들 다시 만나고 아픔도 슬픔도 없이 편안하면 좋겠어. 오늘은 어디 멀리 가지 말고 우리 곁에 있어. 훨훨 날아 멀리 가더라도 가끔 우리한테 찾아와.

할머니, 내가 할머니 참 좋아해. 다음 생에 만나면 할머니 손녀가 아닌 동무로 만나자. 그때도 할머니 이야기 다 들어줄게.

사랑해.
잘 가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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