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리스트 사랑의 꿈

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18

by 아멜리 Amelie
백건우- 리스트 사랑의 꿈


2018년 10월 16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단연코 ‘뭔가 읽고 있을 때’이다. 광고 전단지도 아주 꼼꼼하게 읽고, 주차장 안내판도 눈여겨본다. 주술 관계가 어색하거나, 이해하기 어렵게 쓰인 문장이 있으면 머릿속으로 그 문장을 다시 써보기도 한다. 대학교를 다닐 때 가장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그땐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게 좋았다. 자기 전에 읽는 책, 버스에서 보는 책, 휴강처럼 갑자기 시간이 생기면 읽는 책, 화장실에서 보는 책, 책상에 앉아서 작정하고 읽는 책, 주말에 보는 책, 자고 일어나서 읽는 책처럼 책마다 읽는 시간과 공간이 다 달랐다. 이걸 한꺼번에 읽는다고 흐름이 끊기지도 않았다. 제사 지내고 먹는 나물 비빔밥처럼 한꺼번에 먹고 있지만 나물 하나하나의 맛을 음미할 수 있듯 글을 느끼며 제각각의 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책을 좋아한다. 그러나 예전만큼 읽지 못하고 하루에 글자 한 자 읽지 못하는 날도 많다. (한 번에 서너 권을 읽었던 때는 복이 차고 넘칠 때였다.) 애가 잘 때 책을 읽으면 되지 않냐고 누가 말한다. 애가 자면 집안일이 글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다. 집안일을 외주 주면 안 되냐고 누가 말한다. 밖에 나가서 돈도 안 버는데 책 읽으려고 사람 쓰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냐고 받아친다. 밤에 애들 다 재워놓고, 집안일 다 해놓고 글 읽으라고 누가 말한다. 나는 언제 자고 언제 쉬냐고 말하며 화를 참는다.

그래서 첫아이를 낳고 키우며 동화책에 재미를 붙였다. 동화책은 소설보다 훨씬 재밌었고, 신세계였다. 이야기도 재밌지만 그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림 보러 미술관을 굳이 가지 않더라도 마음 가는 그림을 만나면 책장을 쓰다듬을 정도로 행복해진다. 동화책을 읽다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날도 있었고, 그때마다 애가 달려와 눈물을 닦아주며 울지 말라고 보듬어주곤 했다.(가끔 남편에게 읽어보라고 권했는데 어떤 땔 같이 울기도 했다.) 애들을 데리고 종종 도서관에 가는데 가기 싫다는 애를 억지로 끌고 갈 때도 있다. 그럴 땐 뭐가 너무 읽고 싶어 미칠 것 같은 날이다. 글자를 못 봐 체한 것처럼 속이 답답할 때다. 염소가 종이 씹어 삼키듯 흰 바탕에 검은색 글자가 찍혀 있는 것이라면 뭐든 눈에 담고 싶은 때다.

아이가 책을 읽어달라고 동화책 한 권을 꺼내서 다가온다. 하던 일을 멈추고 책장을 펼친다. 환하게 웃으며 이런 게 바로 효도라고 아이에게 말한다. 효도가 뭔지 모르는 아이는 코딱지를 파면서 어서 읽으라고 종용한다. (효심이 지극한 딸이다.) 얼마 전부터 아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서 자연캠프에 다녀온 제임스와 시몬 이야기가 담겨 있는 동화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한다. 동화에 등장하는 할아버지는 남극을 좋아해서 지도를 펼쳐놓고 남극과 그곳에 사는 펭귄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 책을 읽고 아이도 남극과 펭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을 때 아이는 장난감 통 구석에 쓰러져 있던 펭귄 인형을 가져와 옆에 앉혀둔다.)

어느 날 밤, 자기 전에 아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 엄마, 펭귄은 날 수 있어?
나: 아니, 날개가 있지만 못 날아. 대신 수영을 정말 잘해.

그 다음날, 자기 전에 아이와 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 난 정말로 멀리멀리 여행을 가고 싶어.
나: 어디?
아이: 남극
나: 남극은 왜?
아이: 펭귄 보러. 사람 아기 말고 펭귄 아기.
나: 그래?
아이: 정말 멀리멀리 여행을 가고 싶은데 아빠 엄마랑 헤어지는 건 슬퍼.

남극, 나에게 ‘미지의 세계’와 거의 동급의 공간이자 의미이다. 지구과학 또는 지리 시간에나 듣고 말했을 단어인 남극에 슬며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곁에 있는 누군가가 뭔가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뭔지 모르지만 그걸 해내면 정말 기뻐하게 되거나, 가슴 벅찬 감동을 얻게 되거나, 즐겁고 행복해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애들이 모두 곁에 누워 잠든 어느 날 밤에 핸드폰으로 남극을 검색해서 이것저것 찾아봤다. 사람은 살지 않고 연구원들만 체류하는 곳, 얼음이 모두 녹으면 바다가 드러나는 북극과 달리 땅이 드러나는 곳, 황제펭귄이 산다는 곳, 나도 그곳에 아이와 같이 가보고 싶어졌다. 지금 당장 남극은 너무 멀어서 못 가니 남쪽에 있는 바다에 먼저 가보자고 했더니 아이는 활짝 핀 나팔꽃처럼 웃으며 좋아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싱가포르 최남단에 있는, 우리나라로 치면 해남 땅끝마을과 같은 곳인 센토사를 가서 바다를 만나게 된다.

** 센토사란?
싱가포르 본섬에서 남쪽으로 약 800m 떨어져 있는 섬으로 말레이어(語)로 '평화와 고요함'을 뜻해요. 1970년대까지 영국의 군사기지였다가 이후 싱가포르 정부의 지원으로 관광단지로 조성되었는데요, 올 6월에 있었던 김정일 국무 위원장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회담으로 우리나라에 더 알려졌답니다.


IMG_1052.jpg?type=w1 우리 셋은 버스와 지하철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강철 체력을 탑재하고 있다.


이번 주 월, 화요일이 유치원 쉬는 날이라 월요일부터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센토사를 향했다. 더위로 인한 탈수를 방지하기 위해 각 1병씩 물통도 챙기고, 갑작스러운 허기짐 예방을 위한 간식도 한 꾸러미 챙겼다. 바다를 향하는 마음은 남극을 가는 사람 못지않게 들떠 있었다. 센토사 팔라완 비치에 도착해 신발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적셨다. 바닷물이 남극에서 올라왔을 거라 믿으며 발을 물에 담그고 펭귄을 떠올렸다. 살이 타오를 것만 같은 태양 아래에서, 30도가 웃도는 더위 속에서 남극과 펭귄을 떠올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우린 그렇게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모래를 친구 삼아 놀았다. 언젠가는 꼭 남극에 가볼 날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뭔가 하고 싶다는 말이 약간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점심시간에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말은 현실 가능성이 1000 퍼센트인 말이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저 달에 살고 있는 옥토끼와 놀고 싶다는 말을 듣고 나면 요즘 뭐가 많이 힘든 건 아닌지 걱정하게 된다. 여기서 어릴 때 하고 싶었던 게 뭔지 돌아본다. 초등학생 때 미스코리아가 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 말이 안 되는 걸 되고 싶어 했다.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중학생 때 의사가 되고 싶었다. (아이 팔에 들어가는 주삿바늘을 보고 세 번이나 쓰러졌다. 주삿바늘 보고도 쓰러지는데 의사가 되고 싶었다니 다시 한번 부끄러워진다.) 고등학생 때 정치인이 되고 싶었다. (피가 들끓던 시절이었고, 세상을 바꿀 사람이 필요하다면 그게 나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생 때 기자가 되고 싶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시험을 치고 다녔으나 현실의 벽은 높았고, 높은 벽 앞에 쪼그려 앉아 눈물 줄줄 흘리며 소주 한 잔 마시는 신세였다.)


뭔가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건 꿈을 꾸고 있는 중인 거다. 내 꿈은 미스코리아였다가, 의사도 되었다가, 정치인이었다가 기자였다. 비록 어느 것 하나 된 건 없지만 그때마다 그 꿈을 들여다봤고, 가슴이 벅차올랐고, 갈망했고, 해보려 애썼다. 대부분의 꿈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아무것도 이룬 건 없지만 꿈을 꿀 때마다 가졌던 열정과 노력은 마음과 몸속 어딘가에 피와 살이 되어 남았다. 수많은 꿈 중 뭔가 하나 이루었다면 어땠을까. 지금보다 더 나은 즐거움과 행복이 일상에 가득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꿈을 꾸며 쫓느라 정신없었을까.


언젠가 책을 읽다가 머리를 쿵 하고 한대 맞는 충격에 빠진 날이 있었다. 사람들이 꿈이라 지칭하는 일들은 꼭 이뤄야 하는, 진심으로 바라는 바람이 아니라 안 될 걸 뻔히 알기에 꿈의 영역에 가둬놓고 꿈이 있다는 자체에서 위안을 삼으려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내용이었다.


아직도 나에겐 꿈이 있다. 밥벌이를 하고 애를 키우고 살림을 사는지금도 늘 꾸는 꿈이 있다. 어디 가서 말하기 부끄럽지만 내 꿈은 소설가이다. 이야기를 짓는 작가가 내 꿈이다. 꿈이 박제될까 두려워 작년부터 조금씩 짓기 시작한 이야기도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고도 험하다. 소설가라는 꿈에서 위안 삼고 그칠까 두려워 이것저것 써본다. 식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쓰고 일기처럼 SNS에 글도 쓰고 음악도 제대로 모르면서 음악 관련 글도 쓰고 책 읽고 독후감도 쓴다. 자꾸 뭐든 쓰다 보면 내 꿈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갈 것 같다는 생각에 두서없이 단어로 문장으로 만들고, 문장을 모아 문단을 만들고 꿈을 향한 계단을 하나 오르는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남극에 가고 싶다는 아이에게 남쪽 바다는 황당할 수 있고, 연결고리가 없을 수도 있지만 뭐라도 하나 꿈에 다가서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대통령이 꿈인 아이가 있다면, 반에서 반장도 해보고, 전교회장도 해봐야 대통령이 된 자신의 모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남쪽 바다를 향하면서 아이는 분홍색 소피아 공주 가방에 좋아하는 공책과 볼펜과 색종이를 챙겼다. 언젠가 그런 마음으로 남극을 향할 때 제대로 된 탐험가의 가방을 쌀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아이의 꿈을 지켜주고, 눈앞에 보여주고 싶었다. 몰려오는 바닷물에 쓸려 사라지는 모래성 같은 꿈일지라도, 나이 들고 철들면 부끄러워지고 마는 꿈일지라도,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법한 말도 안 되는 꿈일지라도 살아 숨 쉬는 공간에서 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적어도 꿈을 향해 올라야 하는 수백, 수천 개의 계단 중 두어 개라도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성취감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IMG_1086.jpg?type=w1 아이가 만든 모래성도 파도소리 들으며 잠들어 태평양으로 인도양으로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다.


오늘은 날이 참 좋았다. 지난주 내내 하루를 빠뜨리지 않고 폭우가 쏟아졌는데 오늘은 아이가 그려놓은 듯 어여쁜 뭉게구름이 하늘을 수놓았고, 젖은 빨래 뽀송해질 만큼 햇살은 힘이 좋았다. 꿈을 향해 다가가기 참 좋은 날이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꿈들 잘 꾸고 사는지 궁금해지는 날이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리스트 사랑의 꿈을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언젠가 내 꿈도 꼭 이뤄지길 다시 한 번 갈망해보는 참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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