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즐거움,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19

by 아멜리 Amelie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 김동규, 임금희 (사)김자경오페라단


2018년 10월 23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밤이다. 최저 기온은 25도이고, 최고 기온은 33도이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쓰지 않고 오후의 더위를 견디는 일은 쉽지 않다. 점심땐 동네 친구 집에서 아이들을 놀게 하고 엄마들끼리 아이스커피를 마셨고, 오후에는 수영장에서 물장구치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덥고 습한 여름 날씨를 가진 10월을 보내고 있다.

10월인데 이렇게 더우니 어색하기 그지없다. 40년 가까이 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오솔길로 여긴 시간인데 여름이라니 작년 이맘때쯤 뭘 했는지 궁금했다. 사진첩을 열어 훑어봤다. 작년 오늘은 일요일이었고, 양평 수능리 주말농장에서 무와 배추밭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초록색 산과 밭, 푸르른 하늘을 못 보면 병에 걸릴 것 같았던 나날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토요일 밤에 친구들과 술을 마신 짝꿍을 깨워서 양평까지 달려갔다. 짝꿍은 밭에 물을 뿌리고 잡초를 뽑기에 앞서 컵라면 하나를 후루룩 마시듯 먹으며 쓰린 속을 달랬다. 임신 7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던 나는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다 그만 배 뭉침이 느껴서 작업에 임한 지 십 분 만에 돗자리에 앉아 푸르름의 끝자락에 다다른 산과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쉬었다. 네 살 딸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돗자리에서 뒹굴뒹굴하며 사과를 먹고 요구르트를 마시며 놀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나와 신랑과 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흙에서 키운 무와 배추를 수확했고 하루 온종일 무청을 다듬어 시래기를 만들었고, 속이 노오란 배추로 배추전을 부쳐먹으며 겨울을 보냈다.


IMG_1225.JPG?type=w1 밭에서 아주 즐겁게 놀던 날이 있었다. 밭은 언제나 재밌었고, 놀거리가 무궁무진했다.


작년 사진을 찾아보고서야 시월이 어떤 날들인지 또렷이 기억난다. 무더위가 줄행랑을 치며 도망가고 뜨겁던 공기가 날카로워진다. 어깨에 걸쳤던 옷이 조금씩 길어지고 두터워진다. 손가락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시원함에 깜짝 놀라며 마른 손을 비벼 온기를 채운다. 그게 나에겐 시월이었다.

여름이었다가 여전히 여름이다가 앞으로도 여름일 이 곳, 싱가포르에서 8개월째 살고 있다. 가끔 아이와 지칠 줄 모르는, 끝이 없는 이곳의 더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 엄마, 싱가포르는 왜 이렇게 더워?”
나: 우리가 지구의 중심(적도)에 가까이 있어서 그래.
아이: 우리가 땅속에 있어?
나: (다시 생각해본 후) 아니야, 우리가 햇님이랑 가까이 있어서 그래.

가끔 너무 더운 날은 내가 서 있는 땅을 기준 삼아 지구와 태양의 움직임을 상상한다. 학창시절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지구의 공전과 자전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하루의 변화와 계절의 변화를 따져본다. 23.5도로 기울어 있다는 지구의 자전축만큼 머리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제자리에서 돌아보기도 한다. 마치 내가 지구라도 된 것처럼.

계절이란 무엇인가. 한여름이란 무엇인가. 더위란 무엇인가. 봄여름가을겨울이란 무엇인가. 좀처럼 변화가 없는 날씨를 보고 있으면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뚜렷한 계절의 변화가 없으니 나의 시간과 나이와 세월이 박제된 기분이다. 늙어가고 있는지 젊어지고 있는지 헷갈릴 때도 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보내고 있으면 마치 잠을 자면서 문을 열면 또 문이 나오고, 그 문을 열면 또 문이 나오는 꿈을 꾸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계절의 변화와 불변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대단한 지 여기 와서 새삼 깨닫는다.

계절이 변하지 않아 좋은 점도 있고 아쉬운 점도 있다. 희로애락을 닮은 봄여름가을겨울이 없어서 섭섭하다.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를 닮은 봄이 주는 즐거움, 제 스스로 성장하는 청춘을 닮은 여름이 주는 기쁨, 질긴 여름 끝에 한숨 쉬어 가는 가을의 여유, 사랑하는 이들 한없이 끌어안아 체온 나누며 살라고 얼어버린 겨울을 다 못 느끼고 살아 아쉽다. 계절마다 오묘하게 다른 마음의 깊이와 넓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오르락내리락 변주가 있는 감정을 못 다 느껴 섭섭하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갈아입으며 색이 달라지는 물과 나무와 하늘의 변화를 못 다 느껴 허전하다.


IMG_0665.jpg?type=w1 어제도 더웠고, 오늘도 덥다. 내일도 덥겠지? (이걸 질문이라고...)


좋은 점이 단 하나도 없으면 여기 못 살 텐데, 다행히 좋은 점이 하나 있다. 계절이 안 바뀌니 계절을 핑계 삼아 오르락내리락하는 내 마음이 없다. 대신 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쉬워지고,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올 때, 뜨거운 열기 앞에서 숨이 멎을 것 같은 더위 앞에, 손끝 시린 바람이 불어닥쳐 마음마저 서늘하게 만들 때, 꽁꽁 언 땅 위에서 온몸과 마음이 얼어붙어버린 시간들 속에서 갈피 못 잡고 우왕좌왕하던 마음이 사라지니 내가 보였다.


내 마음의 곳간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주변 이들에게 나눠줄 심적 여유와 웃음과 애정도 많아진다.


돌아보니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참으로 바빴다. 작년 한 해만 봐도 그렇다. 눈뜨고 일어나 아침밥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애 밥은 꼭 먹여야 했다. 밥 먹다 말고 놀아야 하는 아이를 윽박질러가며 옷 입혀 어린이집에 던지듯 넣어놓고 출근을 한다. 지하철로 오가는 출퇴근 시간이 아니면 책 읽을 시간이 없기에 따끔거리는 눈 비벼가며 책 한 줄 읽는다. 출근하자마자 읽는 첫 번째 메일부터 한숨을 유발한다. 친한 동료들과 점심 먹고 나서는 짧은 산책만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회의하고 컴퓨터 들여다보며 정리하고 또 회의하다 보면 허기가 진다. 퇴근하고 돌아와 아이와 놀아주고 씻기고 집 정리를 한다. 동화책 서너 권 같이 읽으며 아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이 먼저 꿈나라로 보내주고 다시 주방에 가서 반찬을 만들거나 다음날 먹을 음식을 챙겨둔다. 소파에 털썩 주저 않아 한숨 한번 크게 내쉬고 씻고 잠을 청한다. 주말이면 정다운 이들 찾아 만나고, 양평 주말농장도 챙겨야 했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치워야 하는 일만 가득했다. 생각할 겨를도 여유도 없이 말이다. 이런 와중에 계절이 변하면 변하는 계절 따라 마음도 두둥실 떠다녔다. 봄바람 살랑 불어오거나 가을바람 넘실거리면 마음이 땅속으로 꺼졌다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게 살았으니 나를 돌아볼 시간과 마음을 갖는 건 사치 아닌 사치였다.

어떤 때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무덥고 또 무더울 여기가 좋다. 바삐 돌아가는 일상이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고, 계절 따라 술렁거릴 마음이 없으니 나를 들여다보기 좋다. 내 마음을 따라 여행을 하다가 발길이 머무는 곳이 있다. 그럼 마음을 잠깐 멈추게 하고 그때의 나를 다시 마주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예전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지금의 내가 치료해준다. 불안해했던 과거의 나를 만나 지금의 내가 보듬어 안아 준다. 즐겁기 그지없었던 어릴 적 나를 만나 지금의 내가 함께 큰 소리 내어 웃어준다. 내 마음이 풍성해지니 아이들을 바라볼 때나 짝꿍을 바라볼 때에 여유가 조금 더 생긴다. 내 마음의 곳간이 깊어지고 넓어지고 주변 이들에게 나눠줄 심적 여유와 웃음과 애정도 많아진다.

그래. 다 예나 지금이나 다 좋다. 그래서 봄여름가을겨울이 그립지 않냐고?
아니, 그립다. 가끔 사무치게 그립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주던 달콤함이 그립다. 바람이 그립고, 산천초목이 그립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봄여름가을겨울의 각기 다른 들꽃들이 그립다. 그 끝에는 늘 사람이 그립다.

그리하여 뙤약볕 아래에서 이 노래를 듣는다. 나 역시 무더운 나라에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을 살아나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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