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17
2018년 10월 9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지난주 금요일은 싱가포르의 어린이날(10월 5일) 이었다. 한국처럼 공휴일은 아니지만 싱가포르 곳곳에서 어린이날을 맞이해 각종 행사가 열렸다. 한 달 전 에스플라나드(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복합문화공간으로 싱가포르의 유명 관광지 중 하나이다.)에 어린이날 행사로 여러 가지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유료공연 티켓을 미리 사뒀었다. 토요일 오후 공연은 발레였다. 아이가 발레에 관심을 보여서 이 공연을 선택했었는데 티켓을 구입한 직후부터 아이는 발레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발레보다는 걸그룹의 춤이나 내가 추는 막춤(80년대 냄새가 물씬 나고 아무렇게나 흔들어서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춤)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관심사는 명확했고 발레 공연 내내 흥미는 보였으나 몰입은 되지 않는 딱 그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대신 저녁 내내 야외공연장에서 펼쳐지는 무료 공연에 흠뻑 빠져 놀았다. 영화 모아나를 연상케하는 하와이안 춤, 우리나라 북과 장구를 닮은 일본 전통 악기 공연, 뮤지컬 배우들이 탭댄스와 짧은 극을 가미한 뮤지컬 무대까지 흥이 차고 넘치는 우리 식구는 무대 바로 앞에 앉아서 온몸을 음악에 맡기고 놀았다. 공연마다 아이들을 참여시키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큰아이는 온몸으로 참가 의사를 밝혔고 두 번이나 무대에 올라가 공연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공연에 참여한 후 무대를 내려오는 아이의 얼굴에 꽃처럼 활짝 피어난 웃음과 세상을 구한듯 의기양양한 걸음걸이는 두고두고 못 잊을 장면이다. 일요일 오후 공연의 주제는 ‘파티’였다. 보호자와 함께 들어가서 춤을 추는 콘셉트 정도로 공연 내용을 이해하고 티켓을 샀다. 몸을 움직이는 자체를 좋아하는 여자 둘(나와 딸)은 발걸음도 가벼웁게 공연장으로 향했다. 엄마 껌딱지인 둘째 아이와 오롯이 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남편의 불안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미안해 남편, 나도 춤추고 노래하며 놀고 싶었어.)
‘파티’는 화려했다. 아이들이 공연에 참여해 댄서들과 함께 노는 콘셉트였다. 공연 흐름에 대한 '숙지'가 필요했다. 우선 보호자는 인형 옷과 가면을 뒤집어쓰고 어두컴컴한 벽 앞에 앉아서 공연의 클라이맥스까지 모두 지켜본다. 아이들은 공연을 리드하는 댄서들과 함께 일종의 패턴에 맞춰 춤추고 뛰어논다. 공연 막바지에 댄서들이 보호자들에게 신호를 주면 그때 뒤집어썼던 옷과 가면을 벗어던지고 아이들과 춤을 추며 논다. 파티는 막이 내린다. 이렇게 글로 줄줄 쓰다 보니 별다른 감흥 없이 그저 애들 춤추는 모습만 보다가 같이 몸 좀 흠들고 공연이 끝난 것 같아 아쉽다. 왜냐하면 이 공연을 보는 내내 인형 옷과 가면 속의 나는 아주 많은 생각을 했고, 말로 표현이 안되는 감정을 느꼈고, 희열과 함께 묘하게 감동했기 때문이다. 그때의 그 감정을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의 삶의 패턴과 속도, 방향과 180도 다르게, 정말 ‘다르게’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차올랐다고 해야 한다. 아니 욕망이 들끓었다고 해야 한다.
공연이 끝나고 아이의 손을 잡고 공연장을 빠져나오며 조금 멍했다. 으레 아이에게 물어보는 ‘재밌었어? 괜찮았어? 어땠어?’ 따위와 같은 구태의연한 질문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많은 감정의 폭풍우 속에 있다 나와서인지 아이가 느꼈을 그 감정 속에 조금 더 놀게 놔두고, 나도 나의 감정 속에서 조금 더 숨어 있고 싶었다. 공연을 보러 들어갈 때에는 둘째 녀석이 보채며 울지는 않을까, 남편이 너무 힘들어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은 했다.(미안해 남편, 정말 아주 조금 걱정했어.) 공연을 보고 나오는 순간 그런 걱정이 내 머릿속에 들어가 앉아 있을 한 평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큼 나에게는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는 오후 한시의 태양 같은 치명적인 매력을 느낀 시간이었다.
공연 내용이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다. 댄서 세명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음악이 잠깐 멈추면 벽으로 달려가 손으로 벽을 짚고 서 있는다. 대여섯 번을 그렇게 하면 아이들도 댄서들을 따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음악이 멈추면 벽으로 달려간다. 또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음악이 멈추면 이번엔 댄서들이 바닥에 엎드린다. 그렇게 하는 동안 아이들은 우왕좌왕하며 음악이 멈출 때 벽 쪽을 향하다가 수차례 반복되면 댄서들처럼 바닥에 엎드린다. 또다시 음악이 흐르고 한참 춤을 추고 놀다가 음악이 멈추고 댄서들은 그들이 움직이던 자리에서 하던 동작 그대로 ‘얼음’이 된다. 흐르던 음악이 멈추고 고요해지면 바닥에 엎드리던 아이들이 대여섯 번 반복되는 댄서들의 동작을 보다가 곧 그렇게 따라 한다. 음악과 행위에 부여했던 규칙이 변화하면서 아이들은 한동안 우왕좌왕하다가 동일한 패턴을 알아채고 다시 규칙적으로 움직이기를 반복한다.
댄스 공연이라 하기도 애매하고, 참여 극도 아닌 희한한 공연에서 나는 왜 감동을 받아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까지 느꼈을까. 댄서들과 아이들의 움직임은 마치 규칙과 일탈처럼 느껴졌고, 규칙을 정하는 건 댄서로 대변되는 타인이고, 나는 그 규칙을 따라야 하는 아이들과 같은 처지 같았다. 머릿속으로 나도 아이들처럼 춤을 춘다. 나 역시 눈치껏 그 규칙을 보고 곧잘 따라 하고 있는데 댄서인 타인이 규칙을 바꾼다. 바뀐 규칙을 곧바로 따라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시간은 나의 일탈 시간이 된다. 눈치껏 타인이 바꾼 규칙을 간파하고 다시 규칙을 따르는데 이내 규칙은 또다시 바뀌고 나는 일탈하고야 만다. 공연 클라이맥스에서 끊어지지 않는 음악이 흐르고 각자의 자신의 몸과 마음과 에너지에 맞는 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삶 속에서 내 인생의 음악을 켜고 끄는 주체는 ‘나’일까, 아니면 타인일까. 내가 켜고 끄는 그 음악은 내 색깔일까 남의 색깔을 빌려 오거나 얻어왔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색깔의 인간일까. 내 삶 속에서 늘 만나는 패턴들인 ‘규칙’은 내가 만든 것일까, 아니면 남이 만들어다 준 ‘규칙’을 그대로 적용하며 살고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고, 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을까. 나는 누구일까.
어린이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주말을 보내고 지극히 일상적인 월요일을 보냈다. 눈 비비며 일어나는 아이에게 잘 잤냐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혼자 씩씩하게 숟가락질을 하며 아침밥을 먹는 아이 옆에 앉아서 찐한 커피 한잔 호로록 마시며 머릿속으로 하루 일과를 정리했다. 유치원을 다녀온 아이에게 포도와 우유를 간식으로 건네며 ‘유치원 재밌었어? 친구들이랑 뭐하고 놀았어?’ 따위의 너무 일상적이어서 심심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베란다에 널어둔 이불 빨래를 걷으며 빨리 마르지 않을 이불 걱정을 했다. 저녁 준비를 하는 내내 온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둘째 아이를 눈으로 좇아가느라 나의 시신경은 극도의 긴장 상태 속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밥을 다 먹고 식탁을 치우고 아이 둘을 씻기고 한 녀석은 젖을 물려 재우고, 한 녀석을 책을 읽어 재우고 설거지를 마친 남편과 나란히 앉아 쭈쭈바 하나를 빨아먹으며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분명히 어젯밤까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차올라 해가 뜨면 당장 이 집을 박차고 달려나갈 듯한 기세였는데 해가 뜨고 날이 바뀌었지만 뭐 하나 변한 게 없다는 현실을 직시했다. 이제 와서 아무 문제 없는 남편을 갈아치울 수도 없고, 세상에 태어난 자식을 다시 내 몸속에 집어넣을 수도 없고, 이만큼 먹은 나이를 시계태엽 되돌리듯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시 생각은 이어진다. 뭘 어떻게 하면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이 갑자기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와 다르게 살 수 있을까.’ 우리나라 여성 평균 기대 수명은 91세라고 한다. 평균만큼 산다고 가정해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밥 먹고 똥 싸고 웃고 노래하고 떠들고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와 다르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서 시도하고 도전하고 성공해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셈이다. 갑자기 힘이 솟는다. 쭈쭈바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온 식구들 모두 가르릉 가르릉 코 골며 자는 밤중에 노트북 펼쳐 놓고 글을 쓰면서 손가락 끝에 또 힘이 들어간다. 아직 해 볼 만한 게임을 만난 듯싶다. 그리고 이 게임을 잘 풀어나가면 인생이 조금은 달라져 있을 듯싶다.
그래서 이 음악을 듣는다.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와 그반차 부니아티쉬빌리(이들은 자매이다.)가 같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리베르 탱고(A.Piazzolla - Libertango)다. 귀에 익숙한 요요마의 첼로 연주도 좋고, 기타와 반도네온이 탱고를 추듯 얽히고 설키는 리베르 탱고도 좋다. 그럼에도 카티아와 그반차의 연주를 이 영상으로 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온통 초록인 숲속에서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연주하는 모습과 연주 중간에 묘하게 섞여 들리는 새소리가 매력적이어서. 이들의 연주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여기서 잠깐 내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가 연주하는 세르주 갱스부르의 라자바네즈(La javanaise)도 들어보자.
세르주 갱스부르가 부르는 라자바네즈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그대만 괜찮다면 함께 자바 춤을 추며
Ne vous déplaise En dansant la Javanaise
우리 서로를 사랑하기로 해요.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Nous nous aimions Le temps d'une chanson
한국의 어여쁜 가을이 이런 속삭임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내일도 오늘처럼 아침이 오면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겠지.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아이와 식탁에 나란히 앉아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며 바닥에 흘린 밥풀을 주워 먹겠지. 유치원을 다녀오는 아이를 스쿨버스에서 받아안으며 탱고를 추듯 한 바퀴 휙 돌면서 다시 만나 반갑다고 뽀뽀를 하겠지.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 입에 밥 들어가는 거 보면서 오늘 하루도 밖에서 고생했다고 엉덩이 토닥여 주겠지. 삶의 조각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겠지만 내 마음 깊은 곳은 작은 몸부림을 치겠지. 용암이 땅 위로 솟아올라 하늘 향해 터지기 직전까지 오랜 시간 땅 아래에서 끓듯 나의 심장 저 아래 어딘가도 용암만큼 붉고 강한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을 거라 믿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