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읽어주는 아멜리 No.27
2019년 1월 8일에 작성된 이야기입니다.
월요일 저녁 퇴근 풍경은 서울이나 싱가포르나 비슷하다. 아무리 일찍 퇴근을 한다 하더라도 얼굴에 지친 기색이 살짝 녹아 있고, 뒤꿈치가 다소 무거워졌는지 걸을 때마다 신발 끄는 소리를 내는 이들을 길에서 만날 수 있다. 다행히 지하철에서 앉아 가는 이들은 한숨을 폭 하고 내쉰 얼굴이고, 서서 가는 이들은 한 쪽 엉덩이를 어디에라도 걸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밥벌이를 모두 마치고 집으로 향하며 갓 지은 따뜻한 밥이나 국수를 떠올리는 듯한 희미한 웃음도 입가에 묻어 있다. 월요일은 주말이 해결하지 못하게 묶어놓은 일들이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펑펑 터져 나온다. 기차놀이하듯 글자와 글자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메일을 수도 없이 쓰기도 하고, 핸드폰이 손바닥에 눌어붙어 있는 듯 핸드폰을 떼놓지 못하고 누군가와 쉴 새 없이 떠들어야 하기도 한다. 그런 월요일을 보내고 집으로 향하면 언제 주말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게 된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판도라의 상자 속에 가득했던 서류를 정리하고, 지하철에 몸을 실어 내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으로 향했다.
큰 아이는 길고 긴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를 맞이했다.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교실, 새로운 친구 얼굴이 섞인 하루를 보낸 탓인지 저녁밥을 먹자마자 잠들었다고 했다. 큰 아이의 등하교를 따라다니느라 덩달아 바빴던 작은 아이도 방 한쪽에 큰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고 냉장고를 청소하듯 꺼내 놓은 반찬 앞에 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나와 별로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낸, 아니 조금 더 피곤한 하루를 보낸 짝꿍과 마주 보고 앉아 참으로 오랜만에 작은 악마들이 식탁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 어색하지만 편안한 식사 시간을 맞이했다. 우리의 저녁 메인 디시는 회사였고, 사이드 디시는 일이었다.
둘 다 직장생활 십 년 차를 넘어가고 있다. 어떤 일은 설렁설렁해도 잘 하는데 어떤 일을 죽어라 들여다봐도 그저 해내는 것도 버겁다. 또 어떤 일은 하고 싶지만 기회가 잘 없고, 어떤 일은 하기 싫은데 자꾸 들이닥친다. 어렵고 쉽고 힘들고 가벼운 일을 해치우는 것과 별개로 사람 때문에, 관계 때문에, 누군가의 눈 때문에 지치고 힘이 빠지는 때가 있다. 아니, 종종 있다. 아니,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로 오랜만에 짝꿍과 마주 앉은 저녁이 그런 날이었다. 작은 악마들이 잠자는 동안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이고 우적우적 씹어 삼키면서 하루 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쏟아냈다. 짝꿍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귀 쫑긋 세우고 듣다가, 내가 겪어낸 하루를 뱉어낸다. 별반 다르지 않은 회사와 일과 사람 이야기다. 이야기와 이야기가 겹치고, 속상했던 마음과 마음이 모이고, 극복하고 싶은 지점과 순간이 보이고, 자신감과 열정이 희미해진 우리의 모습과 마주했다. 기승전결 중 결론에 다다른 게다. 질문은 단 하나.
“이제 어떻게 할까?”
던지기는 쉽지만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다. 아이를 5년 키우면서 육아에 적합한 단단하고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이제 어떻게 할까?”라며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눈물부터 터져 나올 때가 있었다. 그 답을 몰라서, 또는 그 답을 알지만 행하는 게 힘들어서. 그 답을 모를 땐 찾으러 나서기라도 하면 되는데, 답을 알지만 행하기 어려울 때에는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 마음이 먼저 움직이지 않아 내 엉덩이도, 내 발도, 내 몸뚱어리도 꿈쩍하기 싫어하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분주하게 움직인 손가락은 저녁식사로 꺼내놓은 밥과 반찬을 모두 소진시켰다. 이제 오만가지 생각이 가득 담긴 머리와 단어와 한숨을 동시에 내뱉으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입만이 바쁘다. 회사 생활 십 년 차가 넘어가는 우리는 어디쯤 와 있을까. 수영으로 치면 접영을 마스터하고 플립 턴(물속에서 앞구르기를 하며 도는 턴)은 완성할 줄 알지만 박태환만큼 자연스럽지도, 강력하지도 않은 단계일까. 요리로 치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답시고 심혈을 기울여 불앞에서 야단법석이긴 하지만 내 입에만 맛있고, 다른 사람 입에는 간이 맞지 않거나, 뭔가 심심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요리를 내놓는 단계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 머릿속이 막막해질 때가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이제 막 시작한 사람들보다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밀물처럼 밀려들 때. ‘설마, 그 정도는 아닐 거야’하며 혼자 되뇌어 보지만 자신감이 바닥나 걱정을 밀어낼 힘이 없을 때. 생각만으로 미간에 힘이 들어가고 입속이 까슬까슬해지며 손바닥에서 땀이 다 나는 그럴 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회사 생활 십 년 차에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고 요것도 안다고 으스대지만(?) 집에 오는 길에 소심해질 때가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맞기는 한 것인지, 내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건 아닌지, 내가 안다고 말을 해도 되기는 한 것인지 헷갈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해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얼마나 더 공부를 하고 애써야 전문가가 되는 것인지, 전문가가 되지 못하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몰라서 초조해진다. 에잇 그냥 대충 살자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가도 대충 살다가 밥벌이를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이내 불안해지고 또다시 소심해진다. 소심해서 소시민인가 싶기도 하다가(이런 개그는 현시대에 어울리지 않지만 가끔 혼자 써본다), 그 옛날 가졌던 자신감은 다 어디 가고 뱃살만 남았나 싶다가(느닷없이 가만히 있는 뱃살은 핀잔을 듣곤 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나이 탓을 해본다. (뭐가 잘 안될 때 나이 탓을 하면 거꾸로 오르는 연어처럼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월요일 초저녁에 잠든 아이들은 뒤척임도 없이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다. ‘굿모닝’하며 배시시 웃는 아이 얼굴에 밤 침이 흘러 만든 허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엄마를 오랜만에 만난 아이는 한동안 이불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고 내 팔과 다리를 쓰다듬고 얼굴에 입 맞추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뒤로 넘기며 놀이터에서 같이 뛰어다니며 놀았던 친구 ‘메리’ 이야기를 해준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아침 그림을 그리겠다는 아이는 아침밥이 담긴 식판을 저 멀리 밀어두고 스케치북을 끌어안고 이것저것 두서없이 그려댄다.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크레파스를 쥐고 움직이는 작은 손에는 힘이 가득하고, 아이가 남긴 선은 거침없이 뻗어있고, 둥글게 그린 동그라미는 세상을 품은 듯 꽉 차있다. 아이는 마치 100프로 충전이 된 핸드폰 같았다. 아이는 밤새 쿨쿨 잘 자고 일어나며 어제의 피곤함을 몸에서 밀어냈고, 대신 새로운 에너지를 채웠다. 어제의 기억은 남아있으나 슬프거나 지치는 추억은 아니었으며, 오늘의 할 일은 새로 받은 흰 도화지에 어제와 다른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나도, 짝꿍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 오늘을 쳐지게 만든 생각과 기억으로 밤을 어두컴컴하고 축축하게 두면 안 되는 것이었다. 깊고 깊은 바닷속까지 헤엄쳐 내려가듯 잠들었다 깨어나면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날 받은 새로운 흰 종이 위에 어제 그리다 그만둔 그 지점부터 다시 선을 그어대면 되는 것이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듯하지만 다르지 않나. 햇살도 다르고, 바람도 다르고, 땅의 기운도 다른 것이라면, 내 몸도 마음도 머리도 모두 다른 것이어야 하지 않나.
“이제 어떻게 할까?”
다시 해 본다. 어제 풀리지 않았던 숙제를 마주해본다. 해결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그 숙제를 다시 펼쳐본다. 어제와 다른 에너지로 오늘의 숙제를 마주하면 조금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까.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다르니 말이다. 오늘 퇴근길 발걸음은 어제보다 조금 가벼울 것이고, 책도 두어 쪽 더 읽을 것이고, 아이들과 뒹굴뒹굴하며 놀 생각에 설렐 것이고, 짝꿍의 어깨 역시 덜 쳐져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렇게 싱가포르에서의 밥벌이 일주일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