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梦到北京] 온전한 "나"
모든 나무는 아니지만
모두 자신의 고향에서 생애를 마칠수 있다
모든 선로는 아니지만
따뜻한 봄엔 꽃이 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모든 꽃이 만개하는 것은 아니다
약속한 사람이 다 오는건 아니다
안다, 유성이 밤을 찬미하고
고래가 바다를 위로했다
난 아마 베이징에서 로컬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 같다. 중국인의 삶은 어떤 것인가 궁금했달까, 6년을 베이징에서 살아내고나서야 알았다. 중국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삶이 있고, 난 그 로컬에 들어갈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베이징에 적응하기까지 1년 반이 걸렸고 샤오와는 내가 적응하고 처음으로 알게된 중국인이었다.
중국인으로 사는 삶에 대해 궁금했던 것은 처음 겪은 공산국가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수 없는 공산국가의 삶. 결국 그들은 자유 경제가 있는 공산당이 이끄는 체제의 나라기에 물질주의가 가득한 한국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지만 그 속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거라고 상상했다. 일례로 당에서 말하는 기조가 있으면 바로바로 따른다던지, 그런 것들에 대한 불합리적인것들을 말할 수 없는 환경이라던지 그렇게 삶을 살아갈때 그냥 저항없이 따를 수 있는 이유들같은 것들 말이다. 나의 상상은 그냥 상상이었지만 당의 위력이 강한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저항없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도 했다. 뭔가 주변사람들에 의해 입밖에 못꺼내게끔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전에 대한 불안감이었을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청년들은 그런 기조속에서도 창작을 꿈꾸고 창업을 준비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속박 속의 자유스러움이 느껴졌달까, 그들은 이미 익숙해진 모습이었겠지만 이방인이 바라보기엔 이질적인 공존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겉으로는 민주주의라고하는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쉽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겠다. 중국은 땅이 큰만큼 그 안에서도 새롭게 받아들이고 사라지는것들도 빨라서 애초에 말도 잘 못하고, 중국에 대해 이해도가 낮은 내가 로컬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내가 로컬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은 빨리 낯섬을 이겨내고 안정되고 싶어서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시간이 가진 그 힘을 그때는 몰랐다. 그저 빠르게 안정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을 뿐, 하지만 모든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샤오와는 커피와 사진 그리고 꽃을 좋아하는 베이징런이었다. 그녀를 어떻게 알게되었던건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칭화대학생 소식지를 통해서 알게되었던 것 같다. 당시에 나는 꽃꽂이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았었는데 원데이클래스가 서울만큼 활성화되어있지 않아 클래스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어느날 소식지에 올라온 클래스를 보고 신청해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의 작업실은 칭니엔루역 근처 아파트에 있었다.
그녀는 지금 생각해보면 파티 기획자나 플래너같은 일을 했었던 것 같다. 커피에도 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주변에 커피숍을 하거나 커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추후에 우리에게 근처에 지인이 하는 커피숍겸 서점인 공간을 알려주었는데 그 서점이 나에게 많은 꿈을 꾸게 만든 시작점이기도 했다.
*사진의 YanBooks&Coffee 주소 : 北京市朝阳区平房青年路西里5号院8号楼05底商
당시엔 왕징과 리두, 산리툰정도만 돌아다닐때여서 찐로컬의 동네에 간다는게 너무 설레고 신났던 것 같다. 우리 아파트와 다를바 없이 같은 곳임에도 낯섬이 가득했다. 그전까지 베이징런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남편은 회사동료들의 경조사로 인해 많이 갔던거 같은데 나는 그런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중국 드라마나 영화도 안볼때라 베이징런의 집이라는 자체가 궁금하고 미지의 삶이었다.
우리 앞집 아주머니랑 친해졌었더라면 더 빨리 왕징로컬에 들어갈 수도 있었을텐데 그땐 말도 안통하는데 중국사람을 사귄다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었다.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보다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이후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로컬의 집은 너무 과장되거나 어둡다는걸 샤오와의 집을 방문하고 알게되었다.
샤오와의 집 겸 작업실은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꽃과 사진 그리고 커피,와인을 좋아해서 그런지 소품하나하나가 이쁜 것들이 많았고, 미리 준비한 샤오츠들로 우리를 반겼다. 당시에 그 클래스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람들이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우리를 배려해주었던 기억이 있다. 꽃꽂이를 하고서 느낀 따뜻한 분위기는 내가 말로만 듣던 시끄러운 중국인의 모습이 아닌 차분하고 조용한 중국인의 모습이었다. 이후 남편과 영춘권을 하는 모임에도 같이 참석하며 관계를 이어갔고, 나에게 베이징런의 삶은 서울러너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사람사는 곳은 언어만 다를뿐 결국 본질은 같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첫 중국 친구였다. 그렇게 샤오와를 통해 칭니엔루를 알고 나서 칭니엔루에 있는 조이시티朝阳大悦城 를 몇번이나 방문했었다. 조이시티朝阳大悦城는 우리집앞에 있던 카이더몰보다 크고 SKP보다는 작지만 대중적인 브랜드들이 많았고 크고 작은 행사들을 많이 했다. 윗층에 가면 비누나 도자기, 그림등 원데이클래스를 할 수 있는 곳들이 있어 내가 원하던 쇼핑몰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또 그곳의 서점을 좋아했는데 SKP처럼 큰 창이 있어 조이시티 옆 조양공원을 바라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날 아마도 나는 어렴풋이 베이징에서 남은 기간을 잘 살수 있겠다고 느꼈다. 낯선 곳에서 따뜻함을 느꼈달까, 적응하는데 1년 6개월이 걸릴만큼 느리고 답답했다. 하지만 어렵게만 느껴지던 베이징 사람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고, 낯설게 느껴지던 베이징 역시 서울과 다르지 않다는걸. 로컬에 들어가면 다 해결될거라 생각했던 것들은 결국 스스로 이겨내고 겪어내야 해결이 될 수 밖에없음을, 그러므로 누구도 대신 내 삶을 살아줄수 있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울에서 살아 온 삶이 부모님의 말에 의지하고, 회사에서 시키는대로 살았던 삶이었다면, 베이징에서 진짜 내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스스로 살아내야하는 삶, 스스로 결정하고 일어서고 겪어내고 이겨내서 쟁취해야 하루라는 시간이 만들어지는 삶 말이다. 스스로의 자유로 만들어지는 "나"라는 온전함이 가득한 삶이 시작되었다.
생각의 전환이 시작되면서 또 하나 알게된 것은 난 영원히 로컬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릴적 같이 보고 들었던 것이 다르기에 그 로컬이 말하는 것을 100%이해는 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굳이 그 로컬에 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로컬 중에서 나와 취향이 맞고 취미가 맞는 사람들과 교류를 하는게 최선이다. 로컬이라고 해도 모든걸 다 알수 없고,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알게모르게 쳐져 있을 수 밖에 없는 로컬과 이방인과의 선은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도, 없앨 수도 없다. 그냥 그 선이 있는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로컬에 끼지 못한다고 슬픈 것도 아니고 배척당하는 것도 아니다. 로컬은 로컬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기도하고 난 나 나름대로 로컬의 방식을 따르기도하며, 내가 살아온 삶대로 살기도 한다. 결국엔 서로의 다름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 그게 내가 배운 해외에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낯설고 따뜻한, 사람 냄새가 가득하다면 곁에 머물러도 좋다고, 사람과 사람은 그렇게 이어지는거라고 그렇게 칭녠루에서 만난 샤오와가 말해주었다.
그날 스스로의 자유를 깨웠고, 로컬의 변방에 있는 이방인의 삶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베이징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