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梦到北京] 그때, 그시간에, 그자리에
잃고나면 얼마나 소중했는지 알수 있다는 말도 잃어보기 전엔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지.
분명 파도가 몰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우주가 무너지거든.
상실-김준
중국 베이징엔 중국 정원 예술사에서 최고로 꼽히는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청나라의 옹정제가 만들기 시작한 이 정원은 베르사이유를 다녀온 후 서양 양식에 심취하여 그 아름다움을 중국에도 소유하고 싶어 짓게되었다고 한다. 5대에 걸쳐 150년동안 숲과 호수, 운하등과 함께 서양식 건축물과 중국 각 지방의 건축 양식을 모아놓은 원명원, 장춘원(長春園), 기춘원(綺春園)등 건물들이 가득한 이 공원을 만원지원(萬園之園, 만 개 중의 정원, 정원 중의 정원)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당시엔 유럽식 건축양식의 서양루 등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와 다른 유럽인들이 참여하였하고 하며, 청나라 황실의 진귀한 보물과 동식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약탈당했으며, 이후 문화대혁명 등의 전란을 지나며 오랜 기간 폐허로 방치되었다. 한때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던 이 곳은 현재에 와서는 과거를 매일 마주하는 표상이 되었다. 아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원명원의 이야기이다.
이화원은 베이징에 가보지 않았을때도 알고 있을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Summer Palace, 여름궁전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원명원은 처음 들어봤다. 이화원 옆에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 뭐있는데? 라고 물어보면 다들 얼버무렸다. 처음 들었을 땐 그냥 공원인가보다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하원보다 더 큰 규모에 아픈역사를 가진 공원이었다. 왜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면서도 가볼까라는 마음은 쉽게 생기지 않았다.
칭화대에서 어학 프로그램을 하던 중에 자전거를 살 일이 있어 서문쪽으로 가게되었는데 그때 원명원의 입구를 보았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큰 공원이 있다고 하더라라는 식의 잘 모른다는 느낌의 대답해주었다. 어차피 학교 옆에 있고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한번쯤 둘러보지 뭐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지나쳤다. 이후 좋아하는 중국배우가 그곳에서 촬영한 것을 계기로 실제 안으로 들어가 구경할 일이 생겼는데 규모가 너무 커서 구경한 당일에는 배우가 촬영하였던 서양 풍경구만 겨우 다녀올 수 있었다. 서양 풍경구에는 파괴되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르네상스시대의 석조건물들이 있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쓰러지고 파괴된 석조의 잔해들에는 유럽의 양식이 돋보이는 장식이 많았으며 곳곳에 조각들은 풍경구를 뒤덮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당시 영프연합군의 만행을 그대로 보존하고 후대에 그 참상을 알리는 것에 의의를 두고 파괴된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연합군의 만행은 영프 자국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고 했는데 실제로 눈에 담은 서양풍경구의 모습은 슬프고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폐허속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황화진(黄花阵)을 보니 다른 건축물이 파괴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아름답고 크고 웅장했을지 상상만으로도 멋졌을 서양루였다. 서양루의 잔해를 지나다니면서 공기중에 어떠한 느낌이 계속 스쳤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상실감이란 단어가 계속 맞닿고 있음을 알았다.
베이징은 나에게 많은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감정들을 모두 겪게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투명한 감옥, 모든 사회 능력의 무력화, 자존감의 하락과 우울증, 자식들처럼 키워온 고양이들의 이어진 이별들, 좌절, 실패,침체, 무너짐.. 이 모든 단어들을 고스란히 겪어내고 그 밑에 더 깊은 심연이 있다는걸 깨달은 후에 두터워진 진흙을 누르고 일어설 수 있었다. 상실감이라는 단어는 아주 짧은 시간에 날 무너뜨리기에 좋았다. 난 그냥 허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가 날 밟고 지나가면 그냥 그대로 무너질수 밖에 없는 외형만 가지고 있었다. 신이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고 말해도 좋을만큼 지난 6년동안 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나를 재건하는 과정을 가질 수 있었다. 상실과 재건, 보통은 상실의 시간이 지나고 재건한다고 여기겠지만 사고하는 순간 살아 숨쉬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상실이 시작되면 재빨리 그 상실을 채울 것들을 찾는다.
가족,시간,돈, 나이 모든것을 잃어버렸다. 한국에 돌아오니 나에게 남은건 나와 남편 둘뿐이었다. 나이는 앞자리는 4로 변했고 경단녀로 6년의 시간이 지났다. 통장은 이미 0원이었고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성도 없었다. 상실의 세계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중국에서의 상실감이 날 무너뜨렸다면, 한국에서의 상실감은 내 존재의 불확실성, 난 뭘해야하지였다. 샤오싱에 삶의 이유를 찾았더라면 이제는 존재의 이유가 괴롭혔다. 난 어떻게 살아낼것인가였다. 나이 7-80까지 살것 같은데 어떻게 살아야할지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감도 안왔다. 한국에서 계속 지냈던 친구들은 팀장이나 부장이되었고, 베이징에서 먼저 들어간 친구들은 아이 엄마가 되었거나 직장을 다시 잡아서 회사원이 되었다. 또 다시 아무것도 아닌의 삶은 겪고 싶지 않았다. 안정의 욕구가 생겼다고 해야할까, 뭘하든 어찌되었든 내 영역이 있어야 내 삶의 기둥 역활을 해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다시 0부터 해야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싶었다. 그렇게 내것이면서 한국이 아닌곳에서도 할 수 있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 내가 꾸준히 지치지 않을 수 있는것. 내 브랜딩으로 만들수 있는 것이 나에겐 필요했고 찾아야했다. 그렇게 상실감은 내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주었다.
모든걸 앗아간 상실감은 원명원의 잔해들처럼 매일 마주한다. 가끔은 그 상실감들이 날 덥쳐 흔들고 무너뜨린다. 약해지게 만들고 삶의 의지를 놓게 만든다. 하지만 그 상실의 잔해들이 현실에서 표류하고 있기 때문에 또 잊지 않는다.
내가 사랑했던 내 하나아_루츠키의 삶을, 베이징에서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들을, 그때 느꼈던 비참함을, 꼭 내 것을 해야하는 이유를, 내가 존재하고 매일을 살아가야하는 힘을 상실의 잔해들이 알려준다. 일어나야한다고,다시 시작할수 있다고, 멈추지말라고 말해준다. 잃어버린 상실의 무게를 대면하고 삶을 살아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