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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아루츠키 Feb 07. 2023

살아남은 삶의 이야기들 阜成门 (푸청먼)

[回梦到北京]나는 어떤 길을 가고있는가 

在如此恍惚不定的时间与情绪的变幻中,五感刻印上了各色各样的历史点滴。这些微不足道却又无可替代的回忆,在这冬日的茶馆里突然间从沉睡中被唤醒。


이렇게 불확실한 시간과 정서의 변화 속에서 오감은 각양각색의 역사의 조각들로 각인시켰다. 이런 보잘것없지만 대체할 수 없는 기억들이 이 겨울 찻집에서 문득 깨어났다.


키친 - 요시모토바나나






푸청먼(阜成门,부성문)은 원나라때 명칭은 평칙문(平则门)이었으며, 명나라때, 부성문(阜成门)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석탄을 운송해오는 중요 통로였으며, 물자는 풍요롭고 백성은 안정되다 (物阜民安) 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동쪽편의 차오양먼(朝阳门)과 상응하는 위치이며, 베이징 서쪽의 먼터우거우(门头沟)는 석탄이 생산되던 지역이어서, 베이징성에서 사용하는 석탄 전량이 먼터우거우에서 이 푸청먼을 통해 공급되었다고한다 푸청먼의 천정에는 매화 한송이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중국어에서 매화을 의미하는 메이(梅)가 발음이 같은 석탄 메이(煤) 를 의미하는 것이다.하지만 현재 존재하지 않고 이름만 남아있다.


2018년 어느날과 같이 따종으로 랜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분명 같은 하늘아래의 베이징인데 나는 아직도 이 미지의 세계가 너무 궁금했다. 오래된 것들이 방치되어있는 이곳이 신기했달까, 아마 난 영원히 베이징에서 여행자로 그칠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언니 우리 좀 멀리 가볼래요? 라고 하며 우리가 살던 왕징에서 반대쪽인 서쪽의 끝자락인 푸청먼으로 향했다.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 중 하나인 푸청먼 거리에는 매우 중요한 문화 유물과 기념물이 있는데, 원나라 시대의 묘응사원의 백탑, 중국에서 영향력이 큰 사상가 뤼신의 기념관, 아시아에서 가장 큰 지질학 박물관인 중국 지질박물관 등이 줄지어 있으며, 난뤄구샹이나 우다오잉같은 상업적인 샵들이 가득 메운 곳과 달리 조용하고 관광객이 적으며 붐비는 인파도 없는 곳이었다. 이 푸청먼 후통은 가장 전통적인 모습으로 오래된 거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라오 베이징들의 매력을 찾아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바이타스는 원나라때 지어진 묘응사의 백탑으로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가장 큰 라마(티베트식)탑이라고 한다. 1961년 중국 국무원에 의해 최초의 국가 주요문화유물 중 하나로 발표되었다고 한다.베이징의 특유의 붉은 담장과 유려한 모형의 백탑은 고대의 베이징의 정취를 느끼기 좋다




이 푸청먼까지 오게된 이유는 후난(湖南)음식점이었다. 내 애정맛집이기도 한 渔芙南(위푸난 : 어부남)인데 따종띠엔핑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고 있었고 후난이 어디있는 동네인지도 모르면서 우리동네엔 후난음식점이 없으니까라는 이유를 대며 독특한 인테리어와 모르는 동네라는 호기심에 무작정 찾아갔다.


위푸난의 음식은 내륙지방인 후난 특유의 맵고짜면서 톡특한 맛이 미판(米饭 :쌀밥)과 함께 먹어야 잘 어울렸는데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은 바로 맥주였다. 이 팬더맥주는 베이징 곳곳에 팔기도해서 자주 보았는데 후난맥주였다니 너무 반가웠다. 위푸난의 종업원들은 한국 사람이 어떻게 여기를 알고 왔냐며 신기해했고 근처 뤼신박물관에도 갈 것을 권유했다 그렇게 뤼신박물관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엔 여권을 챙기지 않아서 못들어갔고 이후 한번 더 위푸난에 방문하면서 뤼신 박물관에 갈 수 있게되었다 그날 무슨 영향이있었는지 중국을 떠나기전 그의 고향인 샤오싱으로까지 떠나는 여정으로 이어졌다.






루쉰 보우관 ( 鲁迅博物馆 노신박물관 )

add. 北京市 西城区 宫门口二条19号

business hours. 9:00-16:00 (周二至周日. Closed every Monday)

charge 入场费. Free 免费 무료


박물관은 예약제이긴 하나 박물관 앞에 있는 QR코드로 현장 예약 후 입장 가능하며,인원이 많지 않을 경우에는 어플로 신상에 관한 정보 (여권정보)개제 후 시간입력 후 들어갈 수 있다 *외국인일 경우 앞에 매표소 직원이 도와줄 수 있다(영어 가능)




중화 민족의 사상 문화의 거인이자 중국의 사회 과학을 창조한 뤼쉰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뤼쉰 선생이 그 옆에 있는 루쉰구쥐 (鲁迅故居,노신고거)에서 1924년 5월부터 1926년 8월까지 거주하였다고 한다.


뤼신은 중국 문학가 겸 사상가. 1881.9.25 ~ 1936.10.19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으로 바뀌는 시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아Q정전을 쓴 작가이면서 유명한 사상가인것은 알았는데 의학공부를 하다 반청(反靑) 혁명운동에 참가하게되었다는 세세한 이야기들은 이날 다녀오게되면서 알게되었다


뤼신은 일본에 유학, 고분학원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문학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의학을 단념, 의학도였다가 문학도로 방향을 전환하여 국민성 개조를 위한 문학을 지향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신정부의 교육부원이 되어 일하면서 틈틈이 금석탁본의 수집, 고서연구 등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즈음의 루쉰은 일종의 허무와 자조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유학 시절에 품었던 계몽주의적 포부가 귀국 이후에 현실의 두꺼운 벽 앞에서 점차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그랬던 루쉰이 갑자기 적극적인 문필 활동 쪽으로 선회하게 된 한 가지 계기가 있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그의 첫 번째 작품집 [외침(呐喊)](1923)의 서문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찾아와서 잡지에 수록할 원고를 청탁하자, 루쉰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한다. “가령 창문이 하나도 없고 무너트리기 어려운 무쇠로 지은 방이 있다고 하세. 만일 그 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이 들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막혀 죽을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죽는다면 죽음의 슬픔을 느끼지는 않을 걸세.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을 깨워, 그 불행한 사람들에게 임종의 괴로움을 맛보게 한다면 오히려 더 미안하지 않은가?” 

그러자 친구는 이렇게 반문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일어난 이상, 이 무쇠 방을 무너트릴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잖은가.”친구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루쉰은 글을 한 편 기고했다. 

1918년 5월 15일자 신청년에 실린 그 작품이 바로 첫 번째 단편소설 광인일기였다. ‘루쉰’(魯迅)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고한다.



그를 대표하는 아Q정전은 (타임지선정 20세기 최고의 책으로 뽑혔다) 청나라 말기에 청나라가 망하고 신해혁명이 일어나서 중화민국으로 바뀌는 시기를 쓴 책이다. 시대적으로 아주 중요한 시점을 소설화한 것으로 혁명당원을 자처했으나 도둑으로 몰려서 총살되어 죽는 아Q의 운명을, 혁명 앞에서도 끄떡없는 지배력을 가지고 마을에 군림하는 지주와의 대조로 그려냄으로써 신해혁명의 쓰디쓴 좌절을 나타내고 있었다.


모욕을 받아도 저항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머리 속에서 '정신적 승리'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아Q의 정신구조 즉, 노예근성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함과 동시에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오히려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는 아큐의 운명을 그려 신해혁명의 본질을 비판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읽고 현실적으로 느낄 정도로 중국 사회의 병약함을 적나라하게 그려내었다


중국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는 뤼신의 박물관에 다녀오면서 큰 인상을 받았다.




한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많은 일들을 연결시키고 오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가는 것만을 살피게 되는 것이 과거가 남긴 길이다.나는 현대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 과거의 열악함, 어두움보다는 오래된 기억속에 묻혀진 이야기들에 호기심과 동경이 많았다.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통찰력있게 숲을 볼 줄 아는 뤼신의 눈이 날카로워보였고, 그 혼란한 시대에 살아남은 삶의 이야기들이 전해주는 것들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되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단정할 수 없으며 그저 다들 그 시대에 맞춰 변한 것뿐이라는것도, 나와 다르다고해서 틀린게 아니라고, 다름과 틀림을 인정하게된 계기였다. 나만의 주관과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어야 나의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있다고, 흔들리지 않는 깊은 나만의 뿌리를 내려야 단단한 길을 만들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이가 들어 뒤돌아 본 나의 과거의 길에 어떤 삶의 흔적으로 나열되어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을 잘 써내려간 삶을 살고싶어졌다. 허투로 시간을 버리지 않았고, 하나하나의 그 순간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낸다면, 나다운 삶 그 자체로도 충분했다고 본다.  뒤돌았을 때 아쉬움의 여분은 많겠지만 그로 인해 이야기도 많아질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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