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릇노릇 식빵 위 버터 한 조각

by ami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몰라 일기를 쓰기로 했다. 가감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대충 써보기로. '대충' 쓰는 것은 어렵다. 사실 '잘' 쓰는 것보다도 어렵다. 정말 아무거나 써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도 자꾸만 구조를 찾고 체계를 맞춘다. 그저 일기일 뿐이고, 완벽할 필요도 없고, 완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최선보다 최고를 찾는다.


사춘기 감성이 폭발할 때부터 잔잔히 또 간간히 글을 써왔다. 나름대로 시라고 정의 내린 글도 더러 있었다. 18살 즈음에 쓰던 글은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인생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며, 있는 신 없는 신을 싸잡아 험담하던 때이니 말 다했다. 제발요,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누군가 있다면 들어주세요 저는 헤엄을 못 쳐요!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잘' 써졌기 때문이다. 왜, 음악 하는 사람들이 종종 '전 이별하면 노래가 그렇게 잘 써지더라고요' 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울하고 암울하고 참담할 때에 쓰는 글은 다시 봐도 절절하다. 버킷리스트에 '책 출판하기'가 추가된 게 이때쯤일 거다. 아아 한 없이 나약하고 우울한 나, 그런 내가 쓴 글 좀 봐! 어때, 안타깝지? 몇 년 전 고깃집에서 입가심하라며 사장님이 건넨 작은 박하사탕이 호주머니에 들어있다면 탈탈 털어 그거라도 주고 싶지? 슬픔에 기반한 내 어둑한 글이 비정상적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조금 오래 어둠과 함께했다.


어둠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래도 해 뜬 날에는 괜히 밝아지고 싶었다. 그런 의도는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뜻한 봄날에도, 맹렬한 여름에도, 흙내음이 나는 가을에도, 한숨 같은 겨울에도 어둠은 늘 함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녀석은 나의 하반신만 지배한 것 같았다. 널브러져 있던 팔에 힘을 주고 힘껏 상체를 일으켜 세워도 다리는 꿈쩍 않았는데, 뇌에서 배고프다는 신호를 주니 결국은 일어나 씹을 것을 찾았다. 자린고비도 아니고 가끔은 누군가가 구운 대창을 야무지게 먹는 영상을 봤다. 그러면서 '어우 난 기름진 건 딱 질색이야'라며 '해당 영상에 관심 없음' 설정을 했다. 어둠은 욕구를 앗아간다. 먹는 욕구, 일어설 욕구, 빛을 보고자 하는 욕구, 눈을 뜰 욕구...


그런 시기가 있어서였을까. 나 요즘 되게 괜찮아. 사실 그때와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나는 여전히 회색의 삶을 산다. 늘 어딘가에서 오리무중인 채로. 특별히 뭔가를 잘하지도,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은 채로. 애매한 하루를 사는 건 스스로에게 못할 짓이라 생각한 적 있었다. 한 번 사는 인생 열정을 담아 성실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여기저기에서 떠들어 댈 때, 나 역시 온몸으로 '옳소!'를 외치던 사람이다. 요즘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아이고, 성실이 버겁다. 열정이 무겁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한결 가볍다. 어둠은 언제나 함께하는 내 친구야. 그렇다면 적당히 친하게 지내보는 게 좋지 않나. 그래. 밝음도 어둠도 뭐든 적당히 있는 게 좋다. 반드시 잘 살아야 할까? 그냥 괜찮은 정도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애초에 '잘' 산다는 건 뭘까. 일주일에 한 번씩 오마카세를 먹는 삶이라던가, 스마트폰 최신형이 나오는 족족 갈아타는 그런 삶인가. 불특정 다수가 예뻐요, 멋져요, 닮고 싶어요, 어떤 제품 사용하세요, 공구 열어주세요... 왁자지껄 사랑받는 그런 삶인가. 그런 게 잘 사는 거라면 나는 자신 없다. 나는 특별한 날에만 큰돈을 들여 오마카세를 먹고 싶어. 지금 내 스마트폰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라색인데 이 보라색을 따라잡는 컬러의 기종이 나오기 전까지는 A/S 맡겨가며 쓰고 싶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아낌 받고 싶어. 나는... '대충' 살고 싶다. 대충. 그래도 괜찮은 그런 삶. 그러려면 글부터 적당히 쓰는 걸 해보자! 깔롱 지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노릇노릇 구워진 식빵 위에 대충 떨어뜨려 놓은 버터 조각이 알아서 녹아 스며들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