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겨 죽는 건 싫지만 일단 밀려와보렴

by ami



처음 수영을 배워본 건 초등학생 때였는데, 우연히 서랍 정리를 하다 '수영 초등부' 단체 사진을 발견하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작은 연초록색 땡땡이 무늬가 과하다시피 있는 형광 주황색 원피스 수영복에 그와 세트인 형광 주황색 수모와 꽃분홍색 테두리의 수경이라니. 이 모든 것은 누가 봐도 엄마의 취향이었다.


엄마는 평소 요정 같은 옷을 선호하는데, 옷장을 열면 형광펜통이 따로 없다. 특히 핫핑크 (그냥 핑크도 아닌 대문자 HOT PINK) 톤이나 민트색이 많다. 그에 비해 나의 옷장은 크리미 하거나 회끼가 도는 옷들로 가득하다. 수영복도 3부에 브라운 색이란 말이다. 나는 사진 속 나의 모습에 약간의 분노와 경멸이 일어 수치스러운 채 황급히 엄마에게 달려가 따져 물었다.


- 엄마! 이것 좀 봐봐... (사진을 들이밀며) 나 초등학교 때 입던 수영복 엄마가 사준 거 맞지!

- 뭐가 또오~ (사진을 보더니) 에이, 아니야! 근데 아유 정말 귀여웠네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봐도 엄마 취향이구만

- 이거 네가 사달라고 하도 졸라대서 사줬었어~!


거짓말이다. 엄마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 반드시 거짓말이어야만 한다. 몇 번을 되물어도 엄마는 같은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냥 엄마를 거짓말쟁이라 치부하기로 한다. 작은 똥배가 뽈록 나와 배 근처의 땡땡이는 타원형이었다. 분명히 자기 전 생각날 거야. 초록색 ㄸㅐㅇㄸㅐㅇㅇㅣ와 주황빛으로 물들어버린 나의 어린 수영시절...




그러고 보면 우리는 황홀할 때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고 하지 '물속을 헤엄치는 기분'이라고 하지 않는다. 대게 우울하거나 한탄스러울 때 '물속에 가라앉는 듯한, '깊은 바닷속에 빠져버린 듯한’ 이란 표현을 쓰는 것 같다. 시적으로 쓰이는 물은 잔잔하다가도 매섭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얕보고 있단 생각이 들면 '나를 물로 보는 거냐!'라고 외치지. 이게 무슨 아이러니? 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신기한 화학 물질이다. 가장 약하면서 때론 가장 강한 물질. 사람을 구성하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죽일 수도 있는. 자유 같기도 하지만 통제 같기도 한… 사람이 너무 물 같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나는 꽤나 물처럼 살고 싶다. 고요해 보여도 화나면 폭풍을 일으킬 수 있잖아.


그러니, 내가 당신을 '물 같은 사람'이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칭찬이다. '바다 같은 사람'이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랑이다. 이정하 시인의 유명한 시 구절이 있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너는 내게 물처럼 밀려오라'는. 이것이야 말로 진짜 사랑이지. 막말로 진짜 쓰나미처럼 밀려오면 한 숨 쉴 틈도 없이 잠겨 죽을 텐데, 너라면 쓰나미여도 괜찮으니 일단 밀려오라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런 사람이 드물게 있다. 무턱대고 함께하자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나의 희생과 헌신을 노력이 아닌 사랑에서 말미암아 전하고 싶은 사람이.


그러면 나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이렇게 말할 테다.

나와 같은 세상을 보고, 같은 단어로 말하고, 같은 다정과 배려를 입은 사람아. 나는 듬성듬성 초록을 거머쥔 작은 무인도야. 너는 예쁜 바다구나. 수줍게 찰박대다 의도 없이 부서지는 너의 파도가 참 하얗고 푸르러 하염없이 지켜보고 싶어. 네가 더 예쁘게 빛나도록 나의 키를 낮춰줄 테니 마음껏 햇빛을 쬐렴. 그러다 가끔 성이 나면 언제든 품에 안기렴. 잠겨 죽는 건 싫지만, 그래도 일단 밀려와보렴.

이전 21화노릇노릇 식빵 위 버터 한 조각